[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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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1. 호랑이 선생님

1959년 12월 21일 꿈에도 그리던 미국 의학박사가 된 나는 드디어 4년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나는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세번째 사람이었다.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면역기전을 규명한 내 논문은 이 분야에서 세계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저널오브이뮤놀로지에 당당하게 게재되었다.

미국 외무성은 예우 차원인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의 비행기 표를 1등석으로 예약해줬다. 자부심과 함께 오랜만에 해방감에 젖은 나는 귀국길에 그동안 들러보지 못했던 미국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1등석 비행기표를 이코노미 좌석으로 바꾸고 남은 돈으로 미국 여행길에 나섰다.

뉴욕과 워싱턴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쿄를 경유, 서울로 들어가는 스케줄이었다. 백악관은 물론 말로만 듣던 맨해튼의 5번가를 처음 볼 수 있었다.

59년 12월 26일 나는 한국땅을 밟았다. 여의도 공항에 내린 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국박사학위를 받은 나의 귀국은 동아일보와 연합신문 등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인 셈이다.

나는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조교로 다시 들어간 뒤 2년 후인 1961년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다. 자신감에 충천한 나는 학생들의 강의에서도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일단 영어로 된 미생물학 교과서를 그대로 도입해 교재로 활용했다. 교수가 갖고 있던 강의노트에서 영어가 빽빽히 적힌 원문으로 의학교육이 탈바꿈한 것이었다.

실습시험도 단순한 균 배양이 아니라 미지의 균주를 준 뒤 알아맞추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출석도 체크해 강의를 듣지 않는 학생에겐 사정없이 유급을 줬고, 자신이 실시한 실험도구는 자신이 정리하도록 가르쳤다.

적당히 배우는 데 익숙했던 당시 의과대학생에게 난데없이 엄격한 미국식 신교육이 실시된 것이었다. 어느새 내 이름을 딴 이호랑선생이란 별명이 학생들에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잔뜩 일을 벌이던 나는 곧 이곳이 한국땅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 교육의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교수들의 인맥만들기 소용돌이에 휘말려야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의대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는 기용숙교수지만 서울대의대 교무과장이자 교실내 서열 2위인 박진영교수도 파워가 만만치 않았다.

같은 서울대교수지만 기교수는 경의전 출신이며 박교수는 경성제대 출신이라 둘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이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온 나는 자연 이들의 스카웃 대상이 되었다. 박교수는 자신의 방을 당시 조교에 불과했던 나에게 물려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으며 자신의 집 옆에 내가 전세들게 해 출퇴근을 같이 하도록 했을 정도로 배려했다.

주임교수였던 기교수는 자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의대는 경성제대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날 미생물학교실이 아닌 다른 교실의 K교수가 나를 대학로 학림다방으로 불러냈다. 역시 경성제대 출신이며 박교수의 직속 후배인 K교수는 나에게 박교수의 라인에 서도록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두 분 다 존경하는 스승인지라 나로선 어느 한 쪽에 선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64년 박교수가 간암으로 타계하면서 나의 마음고생은 사라졌지만 교수가 연구와 교육에 골몰하기보다 인맥만들기에 신경을 써야했던 현실이 가슴 아팠다.

당시 내가 박교수의 라인에 빨리 섰더라면 학생과장과 교무과장 등 보직을 거쳐 학장에 이르는 출세가도를 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오늘날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탄바이러스의 발견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된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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