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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백두산 영유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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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구려 건국설화는 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가 집에서 쫓겨나면서 시작된다.

유화부인의 로맨스가 시작된 목욕터(靑河)는 오늘날의 압록강이고, 가출한 후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을 낳은 우발수(優渤水)는 태백산 남쪽에 있다고 한다.

이 태백산이 백두산의 별칭이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은 이밖에 불함산.개마산.도태산.백산.장백산 등이 있다.

주변에 여러 민족이 흩어져 산 데다 '금강산은 산의 재자(才者)요, 백두산은 산의 성자(聖者)' 라는 말도 있듯이 백두산의 다양한 풍모를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고구려 건국설화는 청나라에도 계승된 흔적이 짙다. 백두산 동쪽의 연못에서 세 선녀가 멱을 감고 있었다.

까치 한마리가 붉은 과일을 물고 와 막내선녀(퍼구룬)에게 주었다. 열매를 삼키자 선녀는 곧 임신했다. 몸이 무거워 승천하지 못하다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여진, 즉 청나라의 시조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의 영토의식은 사실 백두산 정도가 아니라 그 옛날 고구려.발해시대의 고토(故土)인 만주벌판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처럼 백두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여기던 청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조선 숙종 때인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지만 비문 중 '동위토문(東爲土門)' 의 해석이 서로 달라 말썽이 계속됐다.

그나마 일제는 1909년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광업권의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지방과 백두산 대부분, 천지마저 청나라에 넘기고 말았다.

조선조의 강응환(姜膺煥)은 옛 영토를 그리며 '백두산 내린 물이 압록강이 되었도다/크고 큰 천지에 분계(分界)는 무슨 일고/슬프다 요동 옛땅을 뉘라서 찾을소냐' 고 읊었다.

시인 김상용(金尙鎔)이 백두산 정계비 초석을 보고 '이끼옷 둘러입고 오늘아직 남았나니/알괘라 고국한(故國恨)을 전코저 함이로다/옛소식 듣는 양하여 가슴아파 하노라' 는 시조를 지은 일제시대는 백두산.만주는커녕 한반도 전체가 외세에 강점당한 시절이었다.

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맺은 국경조약 문서를 본지가 처음 입수해 어제 공개했다. 민족의 지대한 관심이 쏠린 문제가 38년이나 지난 지금 밝혀지다니 때늦은 감도 든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통일에 대비하자면 북한이 외국과 맺은 다른 조약들도 최대한 많이 구해 면밀하게 검토해 두어야겠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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