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셈 '피곤증'과 한국외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0월 20~21일 이틀간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ia-Europe Meeting or 'ASEM) 서울회의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최고의 외교잔치다.

남북이 싸우는 바람에 국제기구본부 하나 유치하지 못하고 국빈이 체재할 영빈관도 없는 처지지만, 대형 초현대식 국제회의용 시설은 이번에 갖추게 됐다.

15개 유럽연합(EU) 회원국과 10개 동아'(East Asia)'시아국가 정상들의 모임을 우리 수도에서 가지게 된 것은 흐뭇해 할 일이다.

***對 동남아.유럽 기반 강화

대규모 국제회의는 어느 것이든 기본적으로 행사(行事)다. 주최하는 나라에 따라 비용의 과다는 물론 회의 결과에 대한 평가나 후속활용이 달라진다.

겉치레 치장과 의식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한다든지 회의기간을 공휴일로 선포한다든지 차량소통을 지나치게 제한해 생산을 제약하고 시민의 불편을 강요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잘 확립된 선진국에서는 없는 일이다. 올림픽도 주최해 보고 IMF-IBRD 서울총회 등의 큰 행사를 치르는 데 이력이 나 있으며 민주화 수준을 꽤 끌어올린 우리는 정부가 국제회의용 통제를 자제할 때가 됐다.

이번 ASEM을 계기로 형식과 프로토콜에서 생길 수 있는 작은 실수를 콤플렉스로 느끼거나 전시 위주에 치중하는 그런 수준의 나라로부터 졸업해야 한다.

동시에 회의기간 중에는 국내외적으로 다른 큰 일들이 전혀 생기지 않는 듯이 정부행사가 언론을 사실상 독점하는 그런 수준의 나라로부터도 탈피해야 한다.

서울 ASEM에서는 2년6개월 전의 런던 때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 큰 뉴스가 나올 게 없다.

ASEM은 1996년 3월 출범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미래를 향해 상당한 성과를 올려놓고 있다. 냉전 종식에 따라 미국만이 초강대국으로 남는 한편 EU가 통합되고 동아시아의 경제력이 성장해 세계경제권이 3각 구도로 편성되는 배경 아래서 ASEM이 탄생했다.

ASEM의 일차적 성과는 뭐니 해도 정치적이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미국의 독주 견제라는 공통 이해관계에 있다. 미국의 시대에 미국이 빠진 동서간 경제협력을 표방하고 국제관계구조를 다극화하려는 것이 ASEM의 특색이다.

그러나 출발 직후 동아시아를 강타한 경제위기로 초장부터 ASEM에 고장이 나고 유럽과 동아시아간에 내재하는 엄청난 격차와 간극으로 인해 ASEM이 순항하기도 전에 'ASEM 피곤증' 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ASEM이 계속 허우적거릴 것 같지만은 않다. 동아시아가 지역으로서의 응집력을 발휘하면서 유럽을 유인하는 데 필요한 자체의 힘을 충분히 기른다면 ASEM은 순항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제력에 다소 기복은 있더라도 그 위상이 계속 올라가고 있으며 금융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동아시아국가들이 상호협력 필요성을 의식하게 됐다.

지난해 11월 마닐라에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10개국과 한.중.일 3개국이 발표한 '동아시아협력에 관한 공동선언' 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밝힌 이정표라고 할 만하다.

이런 것을 시작으로 동아시아가 통화금융 협조체제와 단계적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그 정체성이 계속 축적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는 도정 에서 ASEM은 한동안 말 잔치만을 즐겨야 할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경제통합 추진을

그 사이에라도 한국 외교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ASEM의 틀을 빌려 대동아(對東亞) 외교와 대유럽 외교의 기반을 다지고 그 지평을 넓혀야 할 과제다. 외교의 기본은 양자관계이며 다자간 국제회의는 사실상 양자외교의 연장이다.

한국 외교가 소위 4강관계의 '완결' 에 매달리다 보니 동남아와 유럽에서 쌓아 올린 그 기반의 두께는 엷을 수밖에 없다.

그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의 경제통합에 대한 국가전략개념을 정립해 실행해야 할 과제다.

중간국가일수록 다자간 협력의 틀을 통해 국익의 보호신장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ASEM은 리콴유(李光耀)전 싱가포르 총리의 기민한 이니셔티브로 발족했다. 한국은 원대한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소위 '아세안+3' 을 '동아경제공동체' 로 발전시켜 그 사무국을 서울에 두도록 외교투자를 할 만하다.

이장춘 <전 외교통상부대사.경희대 아태국제대학원 객원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