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 산책

“그대,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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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여러분의 꽃은 어떻습니까? 활짝 피어 있나요? 행복하게 웃고 있나요? 아니면 피지도 못하고 지쳐 시들어가고 있는가요?

사실, 알고 보면 우린 세상에 둘도 없는 꽃입니다. 그러니 매일 웃을 수 있고, 매일 웃어도 되죠. 활짝 핀 꽃은 스스로도 행복합니다. 그 꽃을 보는 이들에게도 기쁨이 되죠. 눈 속에 핀 매화나 진흙 속의 연꽃은 기쁨을 넘어 감동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그래서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더 높은 지위나 명예를 갖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죠. 하지만 끝이 없습니다. 하나가 충족되면 그다음 단계가 보이기 때문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이나 특별한 영적 체험에서 행복을 얻으려 합니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명상이나 기도 등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면 만사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갖고서 말이죠. 후자가 조금 고상하게 들리나요? 하지만 세속적 소유든 영적 체험이든 밖을 향해 ‘어떤 결핍된 것을 갈구’하는 것으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해답은 내 안에 있죠. 내 안의 꽃씨가 ‘본성’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나만의 색깔’로 피어날 때 진정한 행복이 가능합니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우리는 너무 많이 경쟁합니다. 너무 많이 비교하고, 눈치를 보죠. 그래서 정작 ‘내가 원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죠. 남들 하는 만큼 못하면 불안하고, 남들 신경 쓰느라 도무지 내 삶이 없습니다. 한번 떠올려 보세요. 최근에 맘 놓고 행복해했던 적이 언제였는지를. 혹시 밖으로 비교하고 눈치 보느라 ‘이미 내 삶에 가득한 행복’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은 넓고, 나는 작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고, 잘 할 수도 없습니다. 먼저 나의 한계와 가능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선택할 것은 선택해야죠. 그때서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행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차별화된 행복이야말로 ‘안갯속의 막연한 행복’이 아니라 ‘나를 설레게 하고, 몰입하게 하고, 웃음 짓게 하는’ 그런 행복입니다. 그렇게 일상의 삶을 주도적인 선택과 과감한 포기로 이어가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마음의 힘이죠. 선별하는 눈도 필요하고, 내 뜻대로 실행해가는 힘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의문이 생길 거예요. “그럼,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하지?” 과연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 본성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은 포기하는 거죠. ‘무아(無我)’로써 ‘진아(眞我)’를 꽃피우는 겁니다. ‘나 아닌 것,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내려놓고 ‘참 나’를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워내는 거죠.

지난해 봄이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딸기를 심어놓고 익어가는 딸기를 보면서 신기해하고 기뻐하던 일.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늦은 밤까지 머플러를 뜨며 가슴 설레던 일. 틈만 나면 요리에 도전해서 풀인지 빵인지도 모를 찐빵을 쪄놓고는 깔깔대던 일. 밤새워 공부하고 스스로에게 대견해하던 일.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에 몰입할 때의 기쁨’과 ‘주어진 일을 완수해 냈을 때의 만족감’이 그것이었습니다.

꽤 세월이 흘렀죠. 사무실 창틀과 숙소에서, 어릴 때 좋아했던 일을 시도해봤습니다. 일명 제 안의 ‘원예 본능’을 되살려낸 것이죠. 화단에는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 쑥갓, 케일, 가지 모종과 콩을 심었습니다. 사무실에는 바질과 루콜라, 순무, 브로콜리 씨앗을 심었죠. 모종들이 자라서 방울토마토와 고추가 열리고, 씨앗들이 새순으로 자랐습니다. 그것들을 잘라서 예쁘게 선물을 했죠. 비록 아주 적은 양이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큰 선물이더군요. 직접 농사(?)지은 토마토와 고추, 새싹이라 그런지 받는 분들도 무척 행복해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화단 풍경은 제게 생명력의 신비도 일깨워주었죠. 바질과 루콜라 새싹이 햇볕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 창틀에서 소나기를 맞으며 넘어지고 뒤집어지고 하면서도 어떻게든 자라나는 모습. 이런 것들이 제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쓰다듬어 주면 향기로 화답하죠. 그런 바질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올해 봄은 더 기다려집니다. 뭘 심어볼까 하고요.

그렇게 내 안의 ‘원예 본능’은 제게 특별한 행복을 안겨줬습니다. 제 자신이 꽃이라는 걸 일깨워 줬거든요. 이외에도 내 꽃씨(본성)에는 또 얼마나 많은 ‘소망과 소질’이 있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힘들거나 원치 않아도 이생에 완수해야 할 ‘소명이나 사명’도 자리하고 있겠죠. 원불교에서는 ‘처처불상(處處佛像)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부처’라는 뜻이죠. 알고 보면 모두가 꽃이고, 모두가 부처인 셈입니다. 저만의 향기와 빛깔을 가진 꽃처럼 ‘자기다움’으로 활짝 피어날 부처입니다. 불단에 금빛으로 모셔진 부처가 아니죠.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각양각색의 얼굴로 빛나는 살아있는 부처죠. 일터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서있는 바로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부처입니다.

그런데 혹시 ‘나는 잡초야.’ ‘내 안에는 꽃의 유전자가 없어.’ 하며 불신하고 좌절하며 고통스럽게 시들어가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이 우주를 꽃으로 덮고도 남을 씨앗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껏 물을 주지 않았을 뿐이죠. 가꾸고, 돌보지 않았을 따름인 거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세요.” 당신의 꽃씨(본성)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세상에서 활짝 피어날 순간을 말입니다. 당신은 꽃이고 부처니까요.

김은종(법명 준영) 원불교 교무·청개구리선방
일러스트=이정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