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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直指)』, 창조력의 증거 - 대한민국 르네상스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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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우리는 이미 고려 고종 때인 1200년대 초반에 관주활자라 불리던 ‘증도가자’와 ‘상정예문자’라는 금속활자를 갖고 ‘상정예문’ 28부 등을 찍어낸 기록이 있다. 다만 그것들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 중 1377년 주자로 찍어낸 『직지』가 가장 앞선 것일 뿐이다. 그만큼 우리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초일류의 미디어왕국이요, 당대 최고의 문화선진국이자 지식강국이었다.

# 『직지』의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는 『불조직지심체요절』로 기록됐다. 흔히 더 줄여서 『직지심체요절』 혹은 『직지심경』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주로 조사들의 법어 등을 모아놓은 것이지 부처의 진언을 담은 것은 아니기에 ‘경(經)’이라 부르기엔 적절치 않다. 오히려 책의 겉면에 쓰인 대로 ‘직지’라고 줄여 부르는 것이 맞다.

# 『직지』는 본래 상·하 2권인데 지금껏 전해오는 것은 하권 1책뿐이며 그나마 첫 장은 결락된 상태다. 중앙관서가 아닌 지방의 사찰에서 주성해 찍은 것이기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다소 고르지 않고, 몇몇 군데 금속활자 대신 목활자로 대체한 흔적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뒤집진 못한다.

# 『직지』는 현재 우리나라가 아니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그 경위는 이렇다. 구한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1907년 프랑스로 가져가 1911년 드루오 고서 경매장에 내놓은 것을 당대의 부유한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단돈 180프랑에 낙찰받았다. 1943년 앙리 베베르가 숨지자 그의 유언에 따라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현재 도서번호 109번, 기증번호 9832번을 단 채 동양문헌실에 보관돼 있다.

# 『직지』의 마지막 장에 “선광 7년(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주자로 인쇄(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선뜻 누구도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입증해 잠자던 『직지』의 가치를 깨워낸 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일하던 한국인 박병선 박사였다. 박 박사가 『직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67년이었다. 고투 끝에 1972년, 그녀는 인쇄된 글자 가장자리의 금속 흔적인 이른바 ‘쇠똥’을 증거로 『직지』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했다. 그 파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서구 우월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고, 동양의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라 고려가 당시 세계 문화의 최선진국이었음을 알리는 쾌거였다.

# 금속활자로 인쇄하려면 활자뿐 아니라 유성먹과 그것을 제대로 찍어낼 수 있는 질 좋은 종이의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고려인들은 그것을 창조적으로 맞춰냈다. 그런 점에서 『직지』는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일 뿐만 아니라 복합적 창조력의 위대한 상징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 르네상스는 『직지』에 담긴 복합적 창조력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다. 거기 대한민국의 살길이 있고 나와 너의 미래가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