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 무인가 감청설비 대량 구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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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검찰청과 경찰.국방부법무운영단.서울세관 등이 1996년 5월에서 99년 10월 사이 51차례나 3백53대의 무인가 불법 감청설비를 민간업체들로부터 구입해온 사실이 지난해 말 감사원 특감 때 적발된 것으로 6일 밝혀졌다.

특히 이들 수사기관이 사들인 무인가 감청설비 중에는 1백여m 떨어진 곳에서 전화통화 또는 대화내용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와 자동 채록(採錄)장비 등 외국산 고성능 장비가 들어 있다.

또 감청하려는 전화기 또는 사무실에 설치해 대화내용을 전파로 발사.포착하는 초소형 송신기(일명 카드송신기.니들송신기)도 포함됐다. 이는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감사원의 무인가 감청설비 적발실태' 국정감사 자료에서 드러났다. 이런 구입 사례는 현 정부 들어서만도 23차례(1백84대)다.

국가 수사기관들이 이처럼 허가되지 않은 감청설비를 대량 구입한 목적이 불법감청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낳고 있다.

감청설비의 제조.수입.판매는 정보통신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 구입 실태〓자료에 따르면 대검찰청의 경우 96년 5월 서울 Y교역으로부터 인가받지 않은 무선전화 감청용 모니터(모델명 R-800p) 9대를 구입하는 등 99년 말까지 14차례나 무인가 감청설비를 사들였다.

서울세관은 97년 12월 대당 4천5백만원인 무인가 팩스감청 녹취 시스템을 B사에서 구입했으며, 경찰청은 96년 10월 무선호출(삐삐)신호분석기 24대(5억9천만원)를 K사로부터 샀다.

통신비밀보호법 제17조에는 인가없이 감청설비를 제조.수입.판매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감사원은 특감내용을 정통부에 통보하면서 "관계법령을 어긴 10개 업체를 적절히 조치하는 방안을 강구하라" 고 밝혔다.

◇ '불법도청 목적' 논란〓통신업계 관계자는 "통신감청의 경우 법원 영장이 있으면 수사기관은 통신업체의 협조를 얻어 얼마든지 감청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가되지 않은 감청장비를 별도로 사들인 것은 불법감청이 그 목적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수사기관은 현행법상 인가 여부를 확인할 의무가 없지만, 앞으로 인가설비를 구매하도록 조치했다" 며 "그러나 무인가 설비를 구입했다고 해서 도청에 사용됐다고 보기 어렵다" 고 말했다.

대검은 "인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구입한 장비는 불법장비가 아니며, 이를 이용해 불법감청을 한 사실이 없다" 고 해명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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