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이 갖는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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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허만하 선생은 말하자면 화석(化石)같은 분 아닐까□" 산문집 '낙타는…' 을 뒤적이는 기자에게 편집국 동료가 툭 던진 말이다.

그렇다.

화석이란 비유는 허씨가 요즘 세월 보기 드문 희귀한 시인이라는 말이겠고, 또 그의 글 상당 대목이 반세기 전 문단의 삽화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리라. 이를테면 '6월에 바라본 한 시인의 뒷 모습' . 이 산문에는 6.25 부산피난 시절을 그린 김동리의 단편 '밀다원 시대' 의 실제 현장이 담겨 있다.

소설 속에서 '박운삼' 으로 등장해 수면제로 다방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던 사람.

허씨는 박목월이 부산에서 발행했던 잡지 '시문학' 3권(1951년6월)을 뒤져 사건의 진상을 알려준다.

박운삼은 전봉래(시인 전봉건의 친형)였고, 그가 남긴 유서를 통해 명징(明澄)함을 생명으로 알았던 옛 시대 문인의 초상을 되살려 낸다.

"페노비탈을 먹었다.30초가 되었다.아무렇지도 않다.10분이 지났다.눈시울이 무거워진다.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히 살기 위하여 죽음을 맞으리라. 바하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그리운 사람들에게"

허씨의 이 글은 추억담이 아니다.당시 스타 다방의 아가씨들은 그가 잠시 잠든 줄로 알았다고 하는 이 전봉래의 죽음에서 그는 '시인됨의 데스 마스크' 를 떠 보인다.

보자. 1년 전 시집 속의 '한 시인의 데스 마스크 끝 대목' . "…최후의 포옹처럼/펜의 쓸쓸한 무게를 잡았던/바른 손으로/가슴 위에서 자기의 왼손을 잡고//눈부신 이마처럼/조용히 잠자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산문집은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밑그림이기도 한 셈이다.중요한 것은 의사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문학적 침묵을 해야했던 그는 이런 데스 마스크가 침묵을 견디는 힘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할 만하다.

아니 이런 침묵 때문에, 그리고 문학의 사망을 목도해온 서울의 변화로부터 스스로를 닫아 걸 수 있었기 때문에 '고희 신인' 은 더욱 경이롭게 보인다.

우리 짧은 현대 문학사에서 유례가 드문 '원숙함의 문학' 은 박완서 문학과도 비견된다.박완서는 나이 40세에 데뷔했고, 70세를 바라보는 지난해 단편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창작과 비평사)을 통해 결코 낡지 않은 노년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

이런 변화란 해방 직후 40대 중반 연배에 보수문단의 원로 예우를 받았던 월탄 박종화로 대표되는 조로(早老)풍속과도 대조적인 새로운 징후이다.

한 가지. 이번 산문집의 출간은 허씨가 한 눈밝은 출판인과의 만남 때문에 가능했다.평론가이기도 한 임우기는 몇년 전 부산지역에서 허씨의 글을 보고 출판을 결심했다.

사실상의 무명시인을 데뷔시킨 지난해 시집은 지금까지 5쇄를 거듭했고, 허씨에게 2000년 한국시인협회상과 제1회 박용래문학상을 동시에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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