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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그 욕망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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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00년 만의 폭설 대란과 함께 시작된 방송 3사의 월화드라마 삼파전이 뜨겁다. 소재도 다양해 폭설과 한파로 집 안에 발이 묶인 시청자로서는 골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런저런 우려를 낳고 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MBC의 ‘파스타’는 “당신의 요리가 섹스보다 낫다”는 극중 인물의 대사 한마디로 첫 회부터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아이돌 여가수의 신체 부위를 놓고 공공연히 ‘꿀벅지’를 운운하는 사회에서 이 한마디가 뭇매를 맞을 만큼 선정적인지는 곱씹어볼 일이다.

허구(虛構)인 드라마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현실의 욕망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경쟁작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최강자로 등극한 KBS ‘공부의 신’의 흥행 배경도 우리 안에 꿈틀대는 학벌주의, 무한경쟁사회의 ‘정글의 법칙’을 직접화법으로 풀어낸 데 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삼류 고등학교의 문제아들이 특별반에 들어가 집중훈련을 받으면서 최고의 국립 명문대에 합격하는 인생역전을 그리고 있다. 교육방송도 아닌 공영방송의 드라마에서 일류대 진학을 위한 비법을 전수한다는, 어찌 보면 생경할 수도 있는 이 드라마에 중·고등학생인 10대와 부모세대인 40대가 열광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어떤 환경에서도 누구나 열심히 하면 일류대에 갈 수 있다는 신화와 판타지가 일시적이지만 위안과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드라마가 시쳇말로 ‘먹히는’ 것은 우리가 그와는 동떨어진 팍팍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책연구원의 보고서조차 사교육 비중이 늘어나면서 부의 대물림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20대80의 양극화 사회에서 출발점부터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일류대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기 불편하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게다가 패자부활전마저 없다 보니 사회 전체가 양극화 사회가 갖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법을 찾기보다는 ‘내가 승자가 되면 그만’이라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제 20%도 모자라 상위 1%로 가는 전략과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자기계발서들이 ‘먹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공에 대한 ‘집단 강박증’은 인간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자기 성찰’의 기능마저 마비시킨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너나없이 승자가 되겠다고 달려온 결과는 정작 어떠한가. 파이는 커지고 연봉 1억원이 넘는 근로자가 10만 명을 넘어섰지만 사실상 실업자 수가 400만에 달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종합부동산세를 부담하는 미성년자가 400명이 넘는 반면 끼니를 거르는 결식아동이 수십만에 달하는 것이 또한 우리 사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수사(修辭)에 현혹된 우리의 불행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젊은 세대의 목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몰아치지만 대학에 발을 딛는 순간 다시 ‘스펙 전쟁’에 내몰리면서 그들은 청춘의 특권인 사랑도,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도 유보한 지 오래다. 그래서 공동체의 문제보다 개인의 성취를 우선시하는 그들을 탓하기 전에 새로운 출구를 제시해 주지 못한 기성세대의 부채감이 먼저 아프게 다가온다. 절대적 풍요 속에서도 80%로 살아갈 그들이 느끼는 ‘집단 허기’는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

사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심장의 피가 머리에만 공급되고 실핏줄까지 다다르지 못하면 아래로부터 괴사가 진행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 구성원의 80%가 허기를 느끼는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일 수는 없다. 그 해법이 ‘성장’과 ‘경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학습해 왔다. ‘분배’와 ‘공존’ 등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존엄한 가치들을 복원하는 것이 그 답이다.

행복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알려진 에드 디너는 저서에서 물질적 풍요와 대비되는 ‘심리적 부(psychological wealth)’를 쌓으라고 제안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와 의미 있는 목표에 대한 성취감 등 심리적 재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혹독한 자기 성찰을 통해 성장과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고 심리적 부를 축적해 나가야 한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도, 일등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좌표를 제시해 주는 것, 그것이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 세대의 숨통을 틔워주는 길이다.

김미라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