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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발생 일주일 아이티…약탈·악취·죽음의 땅 탈출 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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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7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공항에서 200여 명의 이재민이 미국으로 향하는 미 공군 C-17 수송기에 탑승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포르토프랭스 AP=연합뉴스]

지진 발생 일주일째를 맞았지만 아이티의 혼란과 상처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약탈은 계속되고 거리 민심은 날로 험악해지고 있다. 치안을 통제할 ‘컨트롤 타워’조차 없다. 구호물자도 체계적으로 배급되지 않는다. 물 한 컵, 빵 한 조각을 놓고 허기진 주민들이 서로 다투는 ‘아비규환’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방치된 시신들이 부패하면서 전염병 발생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절망의 땅’을 떠나려는 이재민 수는 급속히 늘고 있다.

◆‘죽음의 땅’ 떠나려는 탈출 행렬=이날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시외버스터미널은 수천 명의 피난 행렬로 하루 종일 북적거렸다. 물과 식량이 바닥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함이 이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한 주민은 “여기는 먹을 것도, 집도, 아무것도 없다”며 “고향에 가면 적어도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버스기사는 요금을 서너 배 이상 올려 받고 있다.

악화되고 있는 치안 불안도 탈출을 부추기고 있다. 지진으로 교도소가 무너지면서 수감돼 있던 강력범 등 재소자 4000여 명이 탈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교회 ‘아이티 미션’을 운영하고 있는 박형준 목사는 “교도소가 무너지는 바람에 2008년 폭동을 주동한 갱단 두목 세 명이 탈출했다는 루머가 퍼지고 있다” 고 말했다.

이날 포르토프랭스 공항 유엔군 관할 구역에선 헬기 한 대가 사고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시티솔레유 방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한때 폭동이 일어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같은 날 포르토프랭스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미국인 한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 대변인 존 커비 해군대령은 “자세한 사고 원인은 아직 모른다”고 밝혔다.

CNN은 “포르토프랭스 도심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약탈이 벌어지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AP통신은 “지진으로 치안 당국도 큰 피해를 본 데다 살아남은 경찰과 군병력마저 대부분 구호 작업에 투입되면서 포르토프랭스는 대낮에도 흉악범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무법천지가 될 위험에 처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공권력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약탈자 출현 등에 대비해 매일 밤 번갈아 가며 자체적으로 보초를 서고 있다고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가 전했다.

현재 아이티에는 물과 식량, 의약품 외에 치약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를 막기 위해 코밑에 바를 수 있는 게 치약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물이 부족해 심각한 위생상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지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고 있는 ‘국경 없는 의사회’ 관계자는 “항생제만 투여하면 회복될 수 있는 환자들이 약이 없어 팔다리를 절단해야 하거나 죽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구조의 손길=유럽연합(EU)은 6억16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부채 탕감과 중장기 국가 재건 지원도 약속했다. 브라질도 지원금을 15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앞서 미국은 1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레오넬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아이티 재건에 5년간 1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정경민 특파원

서울=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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