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추적] 손맛 느끼겠다며 공기총 산 ‘총기 매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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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9시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의 한 아파트로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파트 놀이터로 누가 총을 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었다. 범인은 이 아파트 11층 105㎡(32평)형에 살고 있는 이모(39)씨였다.

아파트에서 이씨를 검거하고 증거물을 찾던 경찰은 깜짝 놀랐다. 안방과 화장실로 이어지는 벽에 설치된 수납공간에서 길이 1m의 M16 모형 총기 4정과 영국제 스톰 공기총 1정을 발견한 것이다. 각 1000여 발의 BB탄이 들어 있는 봉지 2개와 5㎜ 납탄 2박스, 산탄 50여 발도 발견됐다. 납탄 박스 중 하나는 4분의 3 정도가 비어 있었다. 이씨는 ‘총기 매니어’였던 것이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산탄 총알은 경기도 종합사격장에서 엽총 연습을 할 때 썼다”고 진술했다.

나무로 만든 이씨의 안방 출입문에는 ‘사격 표적지’까지 붙어 있었다. 표적지 가운데 부분은 BB탄 사격에 의해 파여 있었다. BB탄은 모형총에 쓰이는 직경 6㎜짜리 플라스틱 탄이다. 이웃 주민에 따르면 이씨는 평소 옥상 등에서 혼자 BB탄 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씨는 다양한 소총의 제원을 줄줄 꿰고 있었다. 이씨의 형(46)은 “AK 소총의 제작자가 어떤 훈장을 받았는지도 알 정도였다”며 “4~5년 전부터 동호회에 가입해 주말에 서바이벌 게임도 즐겼다”고 말했다.

이씨가 모형총이 아닌 공기총을 구입한 것은 지난해 10월.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제대로 된 손맛을 느껴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이씨가 총기를 구입한 총포사의 주인은 “호기심 있는 눈으로 총을 고르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공기총을 구입해 등록하려면 법에 따라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규정상 정신병력을 가진 자는 공기총을 소지할 수 없다. 하지만 이씨는 2008년부터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총기를 등록할 수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정신감정 방법에 대한 특별한 지침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씨는 근처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정신감정도 거쳤지만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

왼쪽 허벅지에 공기총을 맞은 유모(17)군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납탄이 유군이 입은 청바지를 뚫고 들어갔지만 뼈를 상하게 할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씨의 베란다와 안방 창문에서 보면 놀이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직선거리로는 5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씨는 창문을 열고 놀이터 쪽을 향해 공기총 20여 발을 쐈다. 이씨는 경찰에서 “조준 사격한 게 아니라 (노는 소리가) 시끄러워 위협만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19일 이씨에 대해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정봉·권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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