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욱 교수 백두산 관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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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북한 방문단에 포함됐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중앙일보 압록.두만강 탐사단 일행으로 중국측 압록강변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건너가보고 싶다" 는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1백9명의 백두산 관광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것은 챙하고 깨질 것 같은 맑은 하늘의 9월 22일 오후 2시였다.

그곳에서 고려항공 비행기로 갈아타고 곧바로 백두산 삼지연으로 향했다.

비행기 안은 냉방이 되지 않은데다가 이번 여행의 열기마저 더해져 한증막과 다르지 않았다.

삼지연에 있는 소백수 초대소에 여장을 풀고 안내 영상물을 보는 것으로 일정이 시작됐다.

6박7일간의 북한관광이 백두산 일대에 국한된다는 사실외에 누구도 여행일정을 알고 있지 못했다.

대부분 관광 관련 인사들로 구성된 방북단은 일정이 알려지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인데 백두산 일대에서만 머물러야 한다는 일정에 아쉬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북측은 '백두.한라산을 서로 교환 관광한다' 고 합의했던 내용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정을 두고 남북 대표들과 관광단간에 승강이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북측이 방문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묘향산과 평양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북측이 보여준 양보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남아나 중국 여행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보여준 무질서와 무례하기조차 한 행태는 이번 방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성역으로 여기는 곳에서 담배를 피워물거나 여성 안내원들에게 무리하게 노래를 강요하고 북한 사회에 대해 힐난성 질문을 늘어놓으면서 당황스럽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북측이 이런 행태를 지그시 참아내는 모습이 역력했다.

지난해 금강산 여행객 가운데 한 사람의 사소한 말 실수로 한때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되었던 때를 생각하면 이번의 경우 북한은 획기적인 변화를 보인 셈이다.

어떤 인사는 보천보 지역의 곤장덕 언덕에서 압록강변의 중국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면서 '대한민국 만세' 를 외치기까지 했다. 여행일정을 파탄시킬 수 있는 만용이 아닐 수 없다.

묘향산 관광을 안내하던 북한의 관광국 황봉택 처장은 현황을 설명하면서 무심결에 북한을 '우리나라' 라고 지칭했다가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써서 미안합니다" 고 사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에 비해 남한 지도층 인사의 유치한 객기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민들과의 접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여행길에 마주친 주민과 몇마디 인사를 건넬 수 있었고 혁명전적지를 답사하는 학생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천지에서 산천어 어죽을 먹으며 뱃놀이를 즐겼던 일, 황금빛으로 물든 이깔나무 숲이 바다처럼 펼쳐진 1천3백m 고원지대에서의 나날은 속세를 벗어난 환상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밤에는 쏟아지는 별빛을 이고 숲길을 걸어 별장의 침실로 향했다. 방학때 자료들 싸들고 들어와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무엇보다 '심장에 남는 일' 은 개마고원에 서서 산마루가 눈으로 하얗게 변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포태산과 망천아봉이 좌우로 벌려선 풍광을 바라보는 희열이었다.

55년간 쌓아온 적대관념만으로는 북한 땅을 이해할 수도 없고, 북한을 방문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간의 일정이나마 안내원들과 정이 들어 헤어질 때는 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했다.

열흘 전 중국에서 바라보던 그 북녘 땅에서 거꾸로 만주벌을 바라보며 외쳤던 '이 겨레 살리는,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을 이루자는 노랫말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안병욱 교수 <가톨릭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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