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언·말꼬리 잡기…불신 더하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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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여야의 가팔른 대치 정국의 내면을 들춰보면 정치인들의 실언(失言)·막말·말꼬리 잡기의 행태가 쏟아져 나온다.

거친 표현과 말 실수들은 3,4선급 고참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당 간부회의에서,저녁 술집에서 장소 어디서나 쉽게 들을수 있다.

낄낄 거리는 농담자리에서 별 생각없이 흘러 나온 말이 30분도 안돼 상대당으로 전달돼,반박 논평의 소재로 쓰인다.큰 흐름을 잡지 못한채 지엽말단에 집착하는 말꼬리 정치현장이다.

26일 여야영수회담과 관련해 청와대 남궁진(南宮鎭)정무수석과 한나라당 주진우(朱鎭旴)총재비서실장중 누가 먼저 전화했는가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회창(李會昌)총재측은 “朱실장이 이틀전 먼저 南宮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영수회담 얘기를 했다고 청와대측이 흘리고 있다”면서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두 사람이 정국을 풀기 위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보다 ‘누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에 더 신경쓰는 것 같았다.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을 향한 정치가 아니라 오기(傲氣)싸움을 한다”고 혀를 찼다.

중진 정치인들의 실언 소동은 자주 벌어지고 있다.한나라당 김기배(金杞培)사무총장은 25일 “(북한측이 제주도를 좋아하는 것은)반란사건(1948년 4·3사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李총재가 회의장에 들어서기전 농담을 주고받는 자리였긴 하지만 파장이 없을 수 없었다.한나라당엔 일반시민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실언정보를 입수한 민주당은 곧바로 박병석(朴炳錫)대변인을 통해 “제주도를 ‘폭동의 땅’이라고 묘사했다”고 비난성명을 냈다.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날 종일 金총장의 실언이 영수회담으로 정국을 풀려는 李총재의 정국구상을 헝클어뜨릴까봐 걱정했다.

실제로 지난 8월25일에 있었던 민주당 윤철상(尹鐵相)전부총장의 ‘선거비용 실사 여권개입 의혹’발언은 한달 이상동안 정국파행을 촉발했던 핵심요인이었다.

양성철(梁性喆)주미대사의 노근리 사건 발언(‘법률적 해결 바람직 하지 않다’)파장은 본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야당으로 부터 ‘자질 의심’의 빈축 논평을 불렀다.김대중대통령에게도 부담을 주는 행태로 청와대는 신경쓰고 있다.

이런 행태들은 정국 경색의 요인으로 작용하며 정치불신은 높아진다.실언과 거친 용어들이 난무할때의 정국 기상은 흐리기 마련이다.

반면 여유와 유머가 있을때의 정국은 대화쪽이다.1998년말∼99년초 한화갑(韓和甲·민주당)-박희태(朴熺太·한나라당)총무 시절 얘기다.朴총무는 韓총무에게 ‘한화갑’이름자로 3행시를 지어줬다고 한다.

“(한)국에서(화)합을 잘하기로 수훈(갑)”이라는 이 3행시는 韓최고위원이 지난 8·30 민주당 전당대회 경선에서 써먹었던 내용이다.

강북 삼성병원의 이시형(李時炯·정신과)박사는 정치권의 실언과 말꼬리잡기에 대해 “본론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맞싸움을 한다”고 꼬집었다.그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영향력에 걸맞는 말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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