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골프의 불문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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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16면

“그만 두지.”
“무슨 소리.”
“관두고 집에 가자고.”
“괜찮다니깐 그러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94>

승강이는 10분가량이나 계속됐다. 한 편은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는 ‘온건파’, 또 다른 한 편은 “여기까지 온 이상 하늘이 무너져도 나가야 한다”는 ‘강경파’였다. 결국 치열한 싸움은 강경파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 일행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 속에 온몸을 꽁꽁 동여매고 필드로 나섰다. 폭설이 쏟아져 필드는 온통 눈밭이었다. 페어웨이 일부에만 누런 잔디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 러프를 포함한 대부분의 필드는 온통 흰색 물결이었다.

“컬러 볼 준비하셨어요? 이런 날씨엔 오렌지 볼이 아니면 플레이를 할 수 없어요.”
눈이 쌓여 발목까지 잠기는데도 라운드에 나선 우리 일행을 마뜩잖게 바라보던 캐디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우리 일행은 부랴부랴 오렌지 볼을 사들고 필드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코를 에일 듯 했지만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스코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샷이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컬러 볼이라지만 발목까지 잠기는 눈밭에 공을 빠뜨리면 도로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심조심 샷을 하다 보니 그런대로 공은 잘 맞는 편이었다. 그린이 꽁꽁 얼어 있는 탓에 핀을 직접 공략하는 건 금물. 페어웨이에 공을 떨어뜨린 뒤 굴려서 그린 위에 올리는 길이 현명한 핀 공략법이었다. 직접 그린을 때렸다간 공이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9홀을 끝낸 뒤 우리 일행은 클럽하우스로 돌아갔다. 일행 대부분이 공을 잃어버린 뒤였다. 제 아무리 강경파라 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데다 공마저 잃어버리자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005년 겨울, 필자의 에피소드다.
며칠째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필드를 찾는 이가 없지 않은 모양이다. 평균 20cm 이상의 눈이 쌓인 데다 수은주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렸던 지난 주말에도 골프 애호가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서울에서 가까운 퍼블릭 스카이72 골프장에는 지난 토요일엔 36팀, 일요일엔 30팀이 찾아와 골프를 즐겼단다. 이쯤 되면 골프 애호가의 차원을 넘어서 ‘골프광’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이렇게 추운 날씨 속에 골프를 즐기는 나라는 없다. 더구나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필드에 나서는가 하면 가상현실을 이용한 스크린 골프도 호황이라니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는 골프 DNA가 녹아 있다’는 농담이 괜한 말은 아닌 듯싶다.

필자가 골프 연수를 했던 캘리포니아의 경우엔 1년 중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날이 360일을 넘는다. 아무리 추워봤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거의 없다. 이상 기후로 인해 최근 플로리다 지역엔 고드름이 열렸다지만 이런 날씨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더구나 이런 날씨라면 골프장은 텅텅 비게 마련이다. 만약 미국인들이 눈밭에서 골프를 즐기는 한국 사람들을 봤다면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만도 하다. 우리나라가 골프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마추어 골퍼들의 이런 열정이 뒷받침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겨울 골프에도 불문율이 있다. 남의 아들 수능 점수를 묻지 않듯 겨울 골프 스코어도 묻지 않는 게 에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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