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분간 대사 없는 다큐 영화의 소리 없는 흥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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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의 한 장면. 침묵 속에 수행하는 봉쇄 수도원 의 일상이 담겼다. [영화사 진진 제공]

소리 없는 영화 한 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 봉쇄 수도원 수도사들의 침묵수행을 담은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이 관객 5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보통 다큐 영화는 관객 5만 명을 동원하면 ‘대박’으로 통한다. 개봉 6주 만이다. 상영 첫날부터 전회 매진을 기록해 극장도 원래 한 곳(씨네코드 선재)에서 메가박스 코엑스, CGV 압구정, CGV 구로 등 전국 9개 관으로 늘었다. 영화 용어로는 ‘슬리퍼 히트(sleeper hit)’다. 작게 개봉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상영관·상영 기간이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위대한 침묵’은 독일 감독 필립 그뢰닝이 프랑스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에 촬영 신청을 낸 지 15년 만에 허가를 받아 찍었다. 이 수도원은 1688년 지어진 이후 한 번도 일반인에게 내부를 공개한 적이 없다. 독일에서도 35주간 장기 흥행했다. 상영 시간은 162분. 대사는 거의 없다. 바람 소리, 눈 오는 소리, 촛불 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만 나올 뿐이다. ‘아바타’ ‘전우치’ 같은 대작들이 관객 몰이를 하고 있는 요즘, 대체 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영화를 찾는 이들은 누구이며 이유는 무엇일까.

◆명상과 평화의 힘=상영 초반에는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금은 신자(개신교 포함) 대 비신자의 비율이 6 대 4 정도다. 조계종·원불교·성공회 등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연령으로 보면 40~60대가 많다. 지방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단체관람을 오기도 했다. 관객들은 주변에 적극적으로 영화를 알리기도 했다. 작품을 수입한 영화사 진진 김난숙 대표는 “네 번이나 관람한 60대 관객이 있는데 올 때마다 티켓을 20여 장씩 사 갔다”고 말했다.

‘위대한 침묵’은 일종의 스크린 명상록이다. 영화 감상보다 ‘영화 명상’에 가깝다. 정적의 수도원을 소음의 도시에 옮겨 온 모양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영화처럼 조용히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던 건축가 승효상씨는 “영화 보는 3시간은 말 그대로 숨 막히는 순간이었고,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고 말했다. 그는 예상 밖 흥행에 대해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고 분석했다. 이 시대 도시인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 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먹는 즐거움』의 저자 박어진씨도 영화를 본 뒤 티켓 10여 장을 친구들에게 예매해 줬다. 박씨는 “경쟁과 속도 위주의 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이 조미료 없는 음식 같은 담백한 이 영화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졸다 깨다 반복=‘위대한 침묵’은 관람 풍경도 흥미롭다.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조는 것이다. 영화 시작 후 40분쯤이 고비다. 그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보던 사람들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다. 코 고는 소리도 종종 들린다.

인터넷에 올라온 관람 후기를 보면 “3시간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가 상당수다. “극장에 들어가기 직전 커피를 꼭 마실 것” “전날 잠을 푹 자고 가야 한다” 등의 조언도 올라온다. “생고생이 따로 없다” “졸음보다 배고픔을 참기가 더 힘들었다”는 하소연도 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까 봐 나초(과자)를 먹을 수 없었다”는 관객도 있었다. 기도와 묵상을 반복하는 수도사들의 일상이 너무나 고요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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