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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기 파업’ 안 통해 … 법과 원칙이 ‘노사 판’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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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제위기가 닥친 지난해 한국가스안전공사처럼 노조가 양보해서 교섭을 마무리한 곳은 3722개다. 2008년 115개에 비해 양보교섭이 1년 새 32배로 늘었다. 노사합의에 의한 임금인상률은 1.7%에 머물렀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2.7%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노사의 판이 바뀌고 있다. 대립과 투쟁이 협력과 화합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다. 고려대 김동원(경영학) 교수는 “노사화합 기조가 확산되는 것은 단순히 경제위기 영향 탓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며 “노사관계의 큰 틀이 안정기조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법과 원칙의 힘=지난해 5월 21일 쌍용자동차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2405명에 대한 구조조정에 반대해서다. 노조는 새총과 화염병, 사제대포로 무장하고 저항했다. 야당과 노동계는 정부의 중재를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개별사업장의 문제는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라. 불법행위는 엄정하게 대처한다”는 발표만 거듭했다. 77일 만인 8월 6일 노조가 백기를 들었다. 정부는 ‘불법 무관용원칙’을 적용해 노조 간부들을 사법 처리했다. 철도노조의 파업(11월 16일~12월 3일) 때도 원칙이 적용됐다. 노조 간부에 대한 사법 처리와 별도로 192명이 징계를 받았다.

정부는 노사 간 뒷거래도 강경 대응했다. 파업이 끝나면 타결 격려금 명목으로 뒷돈을 챙겨줘 결국 파업을 부추기는 노사의 야합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파업수당을 챙겨준 곳은 없었다. 이에 노동계는 “정부가 강경일변도로만 나와 노조원들의 생계를 옥죄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 스스로 변화=쌍용차 노조는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회사 살리기에 힘을 쏟았다. 대우자동차 노조는 금속노조의 임금인상 지침을 어기고 복지수준을 동결했다. 지난해 양보교섭을 한 사업장 가운데 민주노총 사업장은 308건이었다. 2008년 90건의 3.4배다.

노동운동이 많은 울산은 산업평화지대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3월 현대중공업 노조가 노조 설립 이후 처음으로 임금협상을 사측에 백지위임하면서 무파업 바람은 울산 전역으로 번져 갔다. 현대자동차 근로자는 실리파 노조위원장을 택했다. 현대차는 15년 만에 파업 없는 한 해를 보냈다. 지난해 울산지역에서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는 2782일이다. 2008년에는 9만1446일, 2006년 31만6455일이었다. 노동부 전운배 노사협력정책국장은 “울산이 파업 무풍지대가 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경제위기 상황이 산업현장에 반영된 것일 뿐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 올해는 동결되거나 삭감된 임금을 보전받기 위한 투쟁을 더 치열하게 벌일 것이라는 얘기다.

◆독립노조 바람=민주노총 탈퇴 바람도 거셌다. 지난해 35개 노조가 민주노총을 벗어나 독립노조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인천지하철공사 이성희 전 노조위원장은 김포와 의정부를 잇는 경전철 운영권을 따내기 위해 몇 달 동안 관련 자치단체에서 살다시피했다. 마침내 인천지하철은 지난해 11월 코레일·서울메트로 등 쟁쟁한 사업자를 물리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영진약품 홍승고 노조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우산을 벗자마자(3월) 투쟁복 대신 양복을 입고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변화와 관련, 민주노총 우문숙 대외협력국장은 “일부 노조 지도부가 사용자의 협박이나 회유에 넘어간 것”이라며 “지난해 민주노총에 새로 가입한 노조도 많아 2008년보다 조합원이 3만여 명이나 불어났다”고 말했다.

김기찬·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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