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달라졌다] 下. 이젠 정부도 변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30대 재벌인 A그룹 오너 회장은 정부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대해 불만이다.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 그는 "내가 열심히 하면 됐지 왜 간섭하는가" 라고 주변에 말한다.

이에 대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오너 회장들은 대부분 아직도 '내 기업'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 지적했다.

오너보다 다른 주주의 지분이 더 많고 기업 규모가 커져 공익적인 성격도 있다고 설명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벌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오너 회장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자각도 달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게 변한 재벌이 있는가 하면 거의 변하지 않은 곳도 있다. 경영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오너 회장이 변하지 않으면 재벌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병일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그룹구조와 기업 행태가 많이 변했다" 면서도 "부실 계열사를 안고 가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고 말했다.

현대상선과 현대종합상사는 '벌금 낼 각오' 를 하고 현대건설을 도왔고, 삼성과 LG.SK 등 우량 그룹에도 부실 계열사가 있지만 경기가 좋아지자 지난해 하반기부터 구조조정 속도가 둔화됐다.

업종을 다각화해 경기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려는 경향을 아직도 보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원도 "지난 3년 동안 계열사 수는 줄었지만 합병과 인터넷 등 벤처사업 진출 때문에 재벌이 영위하는 업종 수는 그다지 줄지 않았다" 고 평가했다.

오너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구조 또한 본질적으론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김기원 한국방송대 교수는 "능력이 떨어지는 2세가 최고 경영자가 되는 세습구조 등 오너 지배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면서 "계열사의 독립경영도 총수체제를 고치지 않는 한 이뤄낼 수 없다" 고 주장했다.

현대자동차가 계열분리됐지만 이는 상속차원의 문제지, 오너체제가 바뀐 것은 아니며 현대건설과 현대투자신탁증권에 대한 계열사의 지원도 오너체제가 여전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金교수는 덧붙였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도 "송자 전 교육부장관 파동에서 보듯 오너는 계열사의 이사회를 거수기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면서 "지금은 과도기며 이사회에 의한 경영이 자리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재벌의 고질적인 관행이 다시 나타날 것이란 의견도 나오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익을 중시하는 투명한 경영과 구조조정 등은 스스로의 필요성에 따른 측면이 더 크므로 앞으로도 계속 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그러나 김기원 교수는 "본질이 변하지 않은 만큼 정부가 나서 주도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구태는 되살아날 것" 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한 평가도 입장에 따라 다르다. 이런 가운데 재벌과 학계 일각에서는 정부정책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광식 한국개발연구원(KDI)선임 연구위원은 "재벌구조와 행태는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정부도 자의적인 법 집행과 규제 일변도의 접근방법을 시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규제의 경우 남이라도 오랫동안 거래했으면 시장거래 가격보다 싸게 해주므로 계열사간 거래가격이 시장가격보다 낮다고 해서 무조건 부당하다고 보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김용열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부터 부활하는 출자총액제한 규정도 97년까지의 시행경험을 보면 별 효력이 없었다" 면서 "정부지침이 잘 먹히지 않는 상황에선 시장에 맡기는 게 순리" 라고 말했다.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전 KDI 선임 연구위원)은 "경영권에 걸맞은 책임을 부여하는 것과 경영권을 약화시키는 것은 다르다" 며 "사외이사제도의 급격한 변화와 집중투표제 의무화, 집단소송제 도입 등은 총수의 경영권을 급격히 약화시킬 수 있으므로 신중히 다뤄야 한다" 고 주장했다.

국책연구소의 또다른 연구원은 "정부가 특정 오너나 가신(家臣)을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표적인 구태 사례" 라며 "정부는 시장경제의 틀을 규정하는 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고 강조했다.

김영욱.김남중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