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 할머니 ‘존엄한 죽음의 권리’ 큰 숙제 남기고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오른쪽에서 둘째)이 10일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김 할머니의 사망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존엄사’ 논쟁에 불을 지폈던 김모(78) 할머니가 10일 숨졌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의식불명 상태가 된 지 328일 만이다. 고인이 입원해 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박창일 연세의료원장은 10일 “김 할머니가 낮부터 호흡이 불규칙해지며 상태가 나빠지다 오후 2시57분쯤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김 할머니는 직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김 할머니는 병상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반면 ‘법원 판결에 의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의학적으로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런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다. 각 병원 중환자실에서 흔히 제기되는 것인 데도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의 여파로 의료계에서는 금기된 이슈였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식물 상태의 환자를 보호자 요구에 따라 퇴원시켜 줬던 담당 의사가 2004년 대법원에서 살인방조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입원에서 사망까지=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폐암이 의심돼 기관지 내시경 시술을 받던 도중 식물인간이 됐다. 자녀들은 인공호흡기를 떼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평소 깔끔했던 어머니였다. 중환자실에서 벗은 몸에 시트 하나 걸치고 인공호흡기와 소변줄·수액 등을 주렁주렁 달고 누워 생명만 유지하는 모습은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국내에서 완전한 뇌사가 아닌 식물 상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놓고 소송이 제기된 것은 처음이었다.

사회적 격론 끝에 지난해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공호흡기 제거를 명한 원심판결을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그러나 호흡기를 떼면 곧 사망할 것이라던 의료진의 예상은 빗나갔다. 김 할머니는 스스로 호흡을 이어 갔다. 호흡수·맥박·혈압·산소포화도 등 주요 생명신호(vital sign)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동안 영양 공급 등은 임종 시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10일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존엄사 논쟁 이어질 듯=김 할머니 소송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김 추기경이 의식을 잃기 전 의료진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존엄사 논의에 불이 붙었다. 국회에서는 ‘존엄사법’ ‘자연사법’ 등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이어 김 할머니의 존엄사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의학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의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신체 침해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모든 의료 행위의 주체가 의사였다면, 이는 특정 상황에선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무게를 둔 첫 판결이었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의사가 사전에 문서 등을 통해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또 인공호흡기를 떼고도 6개월 이상 스스로 생명을 이어 간 김 할머니에 대해 ‘존엄사’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제기됐다. 의료계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논의를 계속했다. 연세대와 서울대병원에 이어 대한의사협회도 연명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허대석(서울대 의대 교수) 한국보건의료원장은 “이제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 말기 환자의 경우 본인이 사전에 의사를 밝히면 인공호흡기와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대체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지속적 식물 상태인 환자는 어떻게 할지, 본인이 사전에 의사를 밝히지 못했을 때는 가족의 의견을 어떻게 얼마나 반영할지 등에 대한 문제는 계속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