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교수 "盧정권, 정신 차려라" 질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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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의 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 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과학계를 대표하는 최장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이 최근 '아세아연구'(2004년 가을, 통권117호)에 기고한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이라는 글에서 노무현 정부를 통렬히 비판했다.

프레시안에 따르면 최 교수는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대다수 일반 시민이 직면하고 있는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 인간적 피폐화만큼 큰 문제는 없다"며 "고실업, 고용불안정, 노동시장의 내부분화에 의한 이른바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의한 신용불량자의 양산, 빈곤층의 확대 등 오늘날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을 나타내는 양상들은 IMF개혁패키지를 통해 급격하게 전개된 한국경제의 구조변화를 특징짓는 중심내용들"이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했다.

그는 이어 "민주주의가 평등한 정치 참여의 권리를 통해 실현되고, 시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주어진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며 "IMF 충격의 효과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전면적 확대가 엄청난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경제위기에 대한 정부책임을 추궁했다.

그는 "하나의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는 정치적 사안이 되어야 한다.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회경제적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사안의 범위 내로 들어오지 못하는 현실은 정치가 하찮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왜소화되고 타락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따끔한 일침도 놓았다.

최교수는 그 동안 여야당 간의 갈등이 첨예하였던 정치적 이슈 영역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정당 간의 정치 경쟁의 규칙을 어떻게 제도화하는가▶역사, 이념 및 가치, 정서적 문제를 둘러싼 이슈(역사 바로세우기, 지역감정 극복, 과거사 진상규명 등)▶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지역개발정책 분야▶사회경제적, 정치경제적 이슈 등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최소한 서구 민주주의에서의 상황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문제가 최우선 순위에 자리 잡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중요 의제로 부각되지도 못하고 있다"며 "대신 ''과거사 진상규명''과 같은 이념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삶의 현실적 문제와 거리가 먼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지역 개발주의적 사안들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 잡았다"고 노무현 정부를 질타했다.

그는 또 ''과거사 진상규명'' 등에 대해 "이러한 문제들은 이데올로기나 집단적 열정을 쉽게 동원하게 돼 정치를 극한적 갈등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고, ''행정수도'' 문제에 대해서는 "정책 추진자들이 중앙 집권화의 폐해와 분권과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안, 그것이 과연 주장하는 대로 바람직한 효과를 낳게 될지, 정말 모든 지역이 자립적 발전 모델을 갖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확신은 더욱 약해졌다"고 꼬집었다.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기득권층 위주 경제정책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권위주의적 관치 경제 시기로부터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 영역에서만큼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분야는 없을 것"이라며 "노무현 정부에서조차 실제의 경제 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따지고 보면 기득권 세력이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영역은 냉전 반공주의도 아니고, 친일파 청산 문제와 같은 역사적 가치의 문제도 아닌, 경제와 관련된 이슈 영역"이라며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는 사회경제적 이슈 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그 영역에서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의 제도 개혁이나 역사적-정서적 이슈를 흡수 통합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 몰두하면서 전자(사회경제적 이슈)를 방치해 왔다"고 질타했다.

그는 "그 결과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경제정책은 유사하게 됐고, 과거 권위주의적 관치 경제를 주도하고 운영했던 관료의 수중에 놓이게 됐다"며 노무현 정부가 관료의 덫에 걸려 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경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또는 ''시장은 정치적인 것이다''는 정의가 가능하다면 성장이든 시장 효율성이든 그것은 사회의 힘의 관계와 가치가 반영된 정치적 결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 속에서 시민사회로부터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한 운동의 힘들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재벌 중심의 대기업 생산체제와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 성장, 한 정권의 경제적 업적이 재벌 기업의 투자와 업적에 의존하게 될 때, 정부의 성장 정책은 이들 기업의 투자 인센티브와 투자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런 정책은 수출이 호조를 띠고 기업 이윤이 증가해 경제 전체의 성장률이 상승한다 하더라도 고용의 증대와 아울러 노동자 집단의 권익 증대, 노동 조건의 향상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런 경제 체제 하에서)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전투성은 그들이 민간 부문이든 공공 부문이든 대규모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운동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노동운동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를 제어하는 영향력을 조직하는 데 큰 한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오늘의 한국경제 문제는 재벌 기업의 노사가 민주적 틀 내에서 어떠한 공존 협력 관계를 설정하느냐, 어떻게 중소기업 발전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만드느냐, 어떻게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다이나믹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시장 구조를 창출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특히 광범한 중소기업 부문이 재활성화되지 않는 한 노동자 집단의 ''2등 노동자화 경향''은 가속화되고, 궁극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기반은 더욱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지털 뉴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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