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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14년…메워지지 않는 갈등의 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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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차라리 장벽이 다시 들어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베를린의 심장부에 위치한 알렉산더 광장. 이곳에서 만난 소녀 스테파니(16)는 통일의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허리가 편찮은 아버지가 수퍼마켓 일용직으로 일해 받는 월급은 1200유로(약 170만원) 정도. 스테파니와 남동생(12), 어머니 등 네 식구가 생활을 꾸려가기에는 빠듯한 액수다. 그래서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과거 동독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실제로 시사주간지 슈테른이 최근 동서독 지역민 1000여명씩을 설문 조사한 결과 21%가 동서독 간 장벽의 부활을 원한다고 답했다. 1990년 이후 지난 14년간 쏟아부은 통일비용은 1조5000억유로(약 2100조원). 이 때문에 독일 경제가 휘청거리자 동서독 주민 간의 원망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베를린의 새로운 중심가로 떠오르는 포츠다머 플라츠.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에서 만난 대학생 우도 카이(24.경제학) 역시 불평을 늘어 놓는다. 스스로 베시(서독 주민)라고 소개한 그는 "동서독 간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해마다 독일 국민총생산의 4%가 동독지역에 흘러들어가고 있다"며 "이는 2%대의 독일 경제성장률 수치보다 높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독지역이 현재 불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일정 부분 그들의 책임도 작지 않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시각은 대다수 베시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시사주간 슈피겔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에도 동독지역이 여전히 낙후돼 있는 원인을 주민들의 해이해진 도덕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외르크 뵈츠라는 동독 출신 젊은이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그는 통일 후 14년간 직업 없이 빈둥대며 살아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틀어박혀 인터넷 서핑을 즐기거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하면서 지낸다. 그래도 실업수당과 저소득층을 위한 생활보호수당을 합쳐 월 690유로를 받는다. 의사는 건강하다고 진단을 내렸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직업소개소가 구해주는 일자리는 마다하고 있다.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동생 역시 같은 수당으로 생계를 너끈히 꾸려가고 있다. 현재 160만명에 이르는 동독지역 실업자 상당수는 뵈츠처럼 귀족 실업자 생활을 즐기고 있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점심 때까지만 일한다(Arbeit bis Mittag)"란 동독인들의 느슨한 노동윤리를 바꾸지 못했다. 동독 출신의 만프레드 슈톨페 교통부 장관은 "정부가 옛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를 경쟁력 있는 조직으로 바꾸는 데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그 결과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지난달 19일 실시된 옛 동독지역 브란덴부르크주와 작센주 선거에서 독일민족연합(DVU).국가민주당(NPD) 등 신나치주의 정당이 주의회에 진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 15주년을 앞둔 독일은 통일이 요구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느라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바로잡습니다

1일자 20면 '독일 통일 14년, 차라리 장벽 다시 들어섰으면' 제하의 기사 중 베를린 장벽 붕괴 14주년이란 표현은 15주년이 맞기에 바로잡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에 붕괴됐으며 동.서독 통일은 90년 10월 3일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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