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수리점 운영하며 소년가장 돌본 성형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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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달 28일 간암으로 54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성형채(成炯彩)씨. 그는 전남 광양에서 30여년 동안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해 온 평범한 시민이었다. 한평생 권력이나 부, 혹은 남다른 명예를 누려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광양읍 목성리 초라한 자택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소년.소녀 가장들을 비롯한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李귀안(54)씨는 "고인은 가난한 이웃의 친구로서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고 회고했다.

그는 1978년부터 지금까지 20여년을 소년.소녀 가장을 말없이 돌보는 데 바쳐왔다.

그와 함께 이들을 도와 온 의형제 崔상호(47)씨는 "지금까지 그가 생활비를 대준 소년.소녀 가장들의 수가 1천여명에 달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월 12일 갑자기 쓰러진 뒤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입원한 병실에서도 "지금껏 사랑을 나눠줬는데 중단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며 아내에게 소년.소녀 가장 30여명의 생활비를 보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자신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보았던 그는 무의탁 노인.환경미화원.우편집배원.파출소 순경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왔다.

그가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것은 첫 딸 경자(22.인제대4)씨가 첫 돌을 맞은 78년 5월 초.

어린이날을 며칠 앞두고 당시 광양초등학교를 다니던 고아 20여명을 초청, 불고기 파티를 해주면서 고아들의 가슴저린 사연을 듣고 평생을 불우이웃 돕기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졸업 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자전거 수리 기술을 익혔다는 成씨는 배고픈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전거 수리점이 호황을 누렸던 80년대 중반에는 한달에 소년.소녀 가장을 1백20여명까지 돌보기도 했다.

부인 김오순(金五順.45)씨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이웃들에게 나눠줘 수입이 좋을 때도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웃을 돕는데 있어 물질만으로 생색내지 않고 혈육 대하듯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저는 아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요. 그래서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자라는 지 지켜봐 주세요. "

그가 보살펴온 소년.소녀가장 가운데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된 元모(21)씨가 중학교 2학년때 보낸 편지가 이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삶을 묵묵히 지원해준 부인과 딸, 그리고 늦둥이 아들 병용(11.초등 5)군은 한결같이 "좋은 일을 하며 살다 가신 아빠가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자전거 수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수입이 대폭 줄었지만 '이웃돕는 일은 줄일 수 없다' 는 신념에 따라 어떤 때는 빚까지 얻어가며 생활비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92년 광양군민의 상, 95년 자랑스런 신한국인상 등을 수상한 그는 육신은 갔으나 '이웃 사랑의 등불' 로 남을 것이다.

광주=구두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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