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그래도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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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외마디 비명은 우리 부부가 한참 싸운뒤 정적을 깨는 소리였습니다. 거듭되는 경기 악화와 그간 저축해 놨던 돈마저 사기를 당한 뒤 집마저 처분할 위기에 놓인 저희는 그간의 잉꼬부부란 소리에 무색하게 크게 싸웠습니다.

왜 이 지경까지 왔느냐는 신랑의 질타에 저도 억울함을 호소하며 맞섰습니다. 그런데 그때 방에서 자던 아들 수민이가 나와서 별안간 아빠 다리를 물어버리는 게 아닙니까? 두 돌도 안된, 그것도 다른 애들보다 말이 느려서 늘 걱정이었던 아들이 엄마에게 소리지른 아빠의 다리를 피가 나도록 물고 나선 서럽게 울어버렸습니다. 그전까지 울면서 대들던 난 어린 아들의 뜻밖의 행동에 더욱 서러워 아들을 부둥켜 안고 새벽 내내 울었습니다.

그 며칠 뒤 우리 가족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게며 집을 처분하고 신랑이 7년 동안 몸담아온 은행마저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래도 신용불량자 딱지와 여기저기 빚 독촉하는 사람들이 남겨졌습니다.

시어른들께선 이런 날 집안 말아먹은 몹쓸 며느리로 내치려 하셨지만 신랑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30년을 살아온 부산을 떠나 도망치듯 경기도로 옮겨 왔습니다.

처음엔 모든 게 막막했습니다. 방 구할 돈이 없어 식당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견뎠죠. 6개월 정도 지나서야 월세긴 하지만 방 한칸도 마련하고 조금씩이지만 빚을 갚아 가면서 아들 얼굴을 보며 웃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시댁은 물론이고 친정하고도 연락조차 않고 지내는 삶이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요, 자도 자는 게 아닌 공허함과 외로움이 늘 우리 세 식구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기를 1년. 수소문 끝에 저희를 찾은 시어른들께서 다 용서했으니, 그리고 아직 젊으니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거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셨기에 우린 그간의 외로움을 털고 부모님 품으로 가서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린 여전히 경기도에서 열심히 직장을 다니며 미래를 설계합니다. 아직도 신용불량자이며 급여 중 상당액을 빚 갚는 데 쓰지만 우리 세 식구는 여전히 같이 있어 힘이 나고 행복합니다.

어느 비 오던 날 신랑이랑 오랜만에 소주잔을 주고받던 자리에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나와의 끈을 놓지 않았느냐고? 신랑은 2년 전 옛일이 생각난 듯 웃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별안간 자기 다리를 물었을 때 정신이 번쩍 났었답니다. 그날 밤 밤새 저랑 아들녀석이 우는 모습을 보며 무턱대고 아내만 몰아세운 자신을, 잠시나마 이혼을 생각했던 자신을 많이 후회했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릴 지켜달라는 말 못하는 아들의 아우성일거라고….

전 그 얘길 들으며 왠지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이젠 어엿한 네 살이 되어서 잘 까불고 잘 웃고 또 잘 조잘대는 우리 아들녀석의 자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김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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