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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추석에 대한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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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휴식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방금 휴가를 다녀온 사람이라고 했던가. 예년보다 긴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나니 몸이 더 무겁다. 오랜만에 푸근한 고향 공기를 맡고, 반가운 친척.친구와 덕담만 주고받다 왔는데도 이러할진대, 찡그려야 하는 일을 치르고 온 이들의 심신은 오죽할까.

정치인들에겐 특히 달갑잖은 추석이었을 것 같다. 추석 직전 정당 지도자들의 시장 탐방 때 나타난 '성난 민심'을 돌아보면 추석절 동안 정치인들이 겪었을 곤욕을 대충 알 만하다. 정기국회가 본격 무대에 오르기 앞서 이들에게 휴식기를 주면 어떨까. 지역구와 고향에서 담아온 여론을 고스란히 정치에 반영할 수 있도록 반성하는 시간도 줄 겸. 어쨌든 정치권이 이번에 확인한 민심을 정국 운영에 제대로 반영해주길 희망한다.

민심의 주문은 여야가 정쟁을 중단하고, 오늘의 먹고 사는 문제와 내일의 나라 부흥에 매달려 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 정치 상황은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느낌이어서 불안하고 위기감이 크다. 민심에 따르려면 최소한 여야 간 대화 분위기가 잡혀야 하는데 오히려 대결국면이 점차 높아져 가는 형국이다. 곧 시작되는 국정감사에서부터 파열음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수도 이전.국보법 폐지.언론 개혁.친일 청산 문제 등 정치 현안을 들고 각 행정부처를 돌아다니며 벌일 여야의 싸움이 눈에 선하다.

얼마 전 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벌인 열린우리당과 서울시의 '관제데모'시비는 여야 정쟁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차기 대권문제까지 얽혀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내달리고 있다. 각 진영의 인터넷 후원세력들이 뿜어내는 적개심은 한수 더 뜬다. 여권 성향의 사이트에선 "진도(進度) 가 더디다"며 열린우리당을 마구 때린다. 정부 비판 사이트들은 한나라당의 대응이 "뜨뜻미지근하다"고 핏대를 올린다. 축구 응원을 하다말고 맥주병을 깨든 채 운동장으로 뛰어들 기세다. 이대로 가다간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까지 한국 사회는 난장으로 변할지 모른다. 특단의 타협정치 없인 파국이 불가피하다. 정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정치 현안부터 당장 대결이 아닌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서로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이용하라'고 강조했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부터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각과 상호존중으로 폭력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의 견해를 나누어야 합니다."('용서'류시화 옮김) 그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한 가닥 위안이 되는 건 노무현 대통령의 26일자 대국민 메시지 내용이다. "국민 여러분. 많이 힘드시지요? 추석 대목이 없다, 추석 상 차리기가 너무 빠듯하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제 마음도 한없이 무겁습니다." 국민이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도 '힘들고 어려운 국민을 생각하며'라는 팸플릿에서 "서민경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이렇게 힘겨운데 정부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국민 여러분의 질책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과 부총리의 무거운 마음이 말로만 그쳐선 안 된다. 추석 민심을 접하고 왔을 여야 정치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달라진 모습을 행동으로, 정책으로, 정치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만"다음 추석에는 올해의 어려웠던 살림을 추억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이 부총리의 약속도 지켜질 수 있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