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외투는 우리가 먼저 벗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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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과거 대통령후보로 선거운동을 할 때마다 자신의 통일구상을 말하면서 "나는 감옥에서 김일성(사망 이전에)과 수천번의 장기를 두었기 때문에 북한을 다루는 데 문제가 없다" 고 말하곤 했다.

金대통령의 햇볕론은 이런 오랜 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결과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결실을 얻어냈다. 이제부터 그 말대로 본격적인 남북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햇볕론은 이런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통일이 된다 해도 우리가 전적으로 북한을 먹여 살릴 수는 없으니 북한의 경제발전을 도와 어느 수준에 이른 후 자연스럽게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가고 남북간 교류가 늘어나면 북한에도 개방의 바람이 들어가 결국은 우리 체제와 비슷하게 바뀔 것이라는 낙관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런 햇볕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우선 우리가 경제적 뒷심이 있어 북한을 꾸준히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전쟁이론에 따르면 나라 간에 무역 등을 통해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아진다고 해 전쟁위험이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높아진 상호의존 상황에서 더 이상 상대방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전망됐을 때 거기에서 오는 좌절과 스트레스로 인해 전쟁을 도발한다는 것이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인을 이런 데서 찾고 있다. 우리가 북한에 앞으로 몇십억, 아니 몇백억달러를 줄기차게 도와줄 수 있을 때는 그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평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이 나빠져 더 이상 지원을 못할 경우 북한의 태도를 상정해봐야 한다.

주한 미국 대사의 "당신들이 북한을 도와줄 경제적 능력이 있느냐" 는 솔직한 질문을 허술히 들어서는 안된다.

햇볕론은 북한이 변화하려는 자세를 보일 때 효력이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 후 미국이 대북(對北)경제제재를 완화키로 결정했을 때 평양라디오는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경제개혁과 시장개방' 을 경고한 1999년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연설을 재방송했다.

金위원장은 회담 후 전방을 시찰하며 "혁명과 사상의 강자가 되라" 고 지시했다. 노동신문.조선중앙통신 등을 분석해봐도 북한의 대남 전략목표가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가 전혀 없다.

아시아 문제 전문가 로버트 매닝은 '아시아를 흔든 사흘 이후' 라는 글에서 "모든 것이 변했지만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김정일의 갑작스런 변신이 전술의 변화인지, 전략의 변화인지에 대한 답도 찾지 못했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북한이 당장은 변화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햇볕정책은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미국이 중국에 무역최혜국 혜택을 주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허용한 이유도 중국이 지금 비록 공산주의체제를 유지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체제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라는 억압체제는 인간 본성과는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방이 시작되면 결국은 변화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북한도 지금 제한적.선택적 개방을 추구하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그렇게 의도하는 대로만 가주지 않을 것이다.

***南南갈등으로 힘 빼서야

문제는 우리 사회의 건강이다. 북한에 변화가 올 때까지 우리 체제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든든히 버텨낼 힘이 있느냐다. 정상회담 이후 남쪽은 통일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남남갈등이 남북갈등보다 더 심각하다는가 하면 해방 후의 좌우대립 같은 혼란을 우려하기도 한다.

공산주의의 패망이 역사적으로 증명된 마당에 시대착오적인 혼란이 다시 오는 듯하다.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만 보안법을 개정하느니, 헌법을 고치느니 들떠 있다.

이런 남쪽을 겨냥해 북한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 는 식으로 우리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북한이 바뀌기 전에 우리가 병들게 생겼다. 햇볕론은 북한에 따뜻한 햇볕을 보내 외투를 벗게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먼저 외투를 벗는 것은 아닐까.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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