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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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8. 국립창극단 단장 시절

예나 지금이나 나는 욕을 즐겨하는 편이다. 그것도 정말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빠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욕이란 그저 말의 일부분일 뿐이다.

특히 나는 많고 많은 욕 중에서도 '○○한 놈' , '×같다' 등의 말을 즐겨 쓰는 편이다.이는 국립창극단 단장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욕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지만 곧 이어 그 욕에 특별한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긴장을 푸는 듯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 단원들은 내가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대해 몹시 민망해 하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단장님이 그렇게 심한 욕을 하셔서 되겠어요?"

"단장님은 왜 그렇게 욕을 하세요? 좋게 말해도 다 알아듣는데. "

내가 욕을 즐겨하는 것은 결코 이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밀감과 애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원래 뒤에서 남의 말 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욕을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다른 사람 같으면 뒤에서 수군거릴 말들을 모두 다 욕에 담아서 내뱉는 것이니라. "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남의 소리가 나쁘다느니 하는 흉을 본 적이 없다.

단원들은 그제서야 나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섭고 엄한 단장이었느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참 놀기 좋아하는 젊은 단원들은 연습도 안 하려하고 뺀질뺀질거리는 것을 보면 사실 못마땅할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웬만하면 잘못을 해도 본인이 스스로 알고 조심할 때까지 가만히 보고 기다렸다.

그렇게 두고도 안 고쳐져 정 안되겠다 싶으면 불러다가 꾸짖었는데 무작정 화를 낸다기보다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나하나 지적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내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잘 하나 잘못 하나 마찬가지였다. 단원들이 소리를 잘 해도 그저 어깨 한 번 두들겨 주고 고개 한 번 끄덕이면 그게 전부였다.

속으로는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볼 때면 기특하기 그지없었지만 표현은 절제했던 것이다. 그 대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제는 어느덧 중견이다, 명창이다 소리를 듣는 후배들이 주최하는 소리 공연에 나를 초대하면 여간하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내 기본이다.

나를 필요로 하고, 내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가 됐든 가려고 노력한다.

팔순의 나이를 넘긴 지금도 활발히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남들 같으면 손자도 아닌, 증손자 재롱이나 볼 나이에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 고 하는 이들이 많다.

그 비결을 물어 온다면 채식 위주의 식사,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 매일 빠뜨리지 않는 소리 연습도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도 직접 북채를 잡아가며 소리 연습을 하는데,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백시간 분량의 레퍼토리 가운데 끄집어 내어 할 때도 있지만 요새는 주로 그 때 그 때 눈에 들어오는 상황 같은 것을 흥이 나는 대로 소리로 즉석에서 만들어 읊기도 한다.

말하자면 집 앞 마당에 나무가 거슬리면 "저 나무를 베어야겠구나아~ 가려서 차 들어오는 것도 안 보이고 쿠락숀(클랙슨)소리가 나야 아니" 같은 식이다.

박동진<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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