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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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4. 국립국악원 시절

어느덧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해 당시 대전에 있던 본가로 내려갔고 나는 계속 국극단을 따라 지방 순회공연을 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던 중 거창에서 공연을 마치고 한밤중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빨치산과 국군과의 끔찍한 교전 속에 우리 차를 운전하던 운전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숨지는 일을 겪었다. 간신히 살아나온 나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져 그만 고향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어느덧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부모님들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아버지는 "니가 아무리 잘나도 니 아들만 못해" 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들이 백일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뜬 것이다. 그 때 내가 느낀 비통한 심정이란. 다시는 자식을 못 낳겠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고개도 못 드는 아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내 마누라니 죽여도 내가 죽이고 살려도 내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산으로 내려가 김경애씨가 이끄는 국극단에서 아내와 함께 합숙을 하며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덧 또 아들을 낳게 되었고 그 아이는 극단 사람들 모두의 귀염둥이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4.19, 5.16이 일어났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씨가 말하기를 "마누라를 둘 데리고 사는 사람은 관직을 내놓으라" 고 했다.

국립국악원에 이에 따라 면직된 직원이 있어서 결원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내가 국립국악원에 가고 싶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아, 그럼 좋지요. 제가 한 번 다리를 놓아 볼까요?" 그리하여 아내가 직접 이주환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을 찾아갔다.

이원장은 일단 승낙의 뜻을 표했지만, 정식 필기시험을 거쳐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때의 시험문제는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 등에 관한 것이었다.

소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험이었지만 여하튼 합격했고, 국악사의 자리를 얻었다.

국악원에 들어오고 보니 '이 곳이야말로 정말로 내가 공부할 수 있는 데로구나' 싶었다. 14년간 국악원 직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의 식사 메뉴는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자장면' 이었다. 밥 먹으러 갈 시간도 아까워 자장면을 시켜 먹어가며 소리 공부에 전념했던 것이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국악원이 장충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나는 차비를 아끼려고 종로구 원서동 집에서 장충동 국악원까지 매일 걸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 매일 아침 수위의 잠을 깨우며 출근을 했다.

새벽부터 소리를 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로부터 시끄럽다는 항의도 많이 받았다. 내가 겪은 수모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요새 말로 국악계에서 '왕따' 나 다름 없었다. 다른 국악인들은 모두 국악협회 소속인데, 나만 홀로 국립국악원 직원 신분이었으니 그랬을 법도 했다. 오죽하면 한번은 김연수씨가 나를 찾아와 길 한가운데서 멱살을 잡으며 "이 놈 때려죽인다" 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는 나는 그들과 상관 없이 묵묵히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소리 공부에 전념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첼로.피아노.플루트 같은 양악은 모두 발표회를 하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못하는가. 나도 한번 개인발표회를 해야겠다' .

그것도 기왕에 소리 발표회를 할 바엔 제대로 된 완창 판소리 무대를 선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박동진<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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