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감사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1436년 당대의 천재적인 건축가 브르넬리스키는 지름이 42m, 높이가 114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을 완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온고지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봐도 기적 같은 건축물이다. 그 돔의 꼭대기에 닿으려면 가파르고 좁다란 464개의 계단을 한 걸음씩 정직하게 올라야 한다. 마치 저마다의 인생길처럼.

#인적 끊긴 계단길을 혼자 오르며 고독과 한기(寒氣), 그리고 섬뜩함과 비장감을 함께 느꼈다. 하지만 좁고 가파른 계단의 좌우와 천장에 가득한 사랑하는 이들의 고백 같은 낙서가 오히려 따뜻함과 온기(溫氣)를 채워줬다. 물론 장난 같은 낙서도 많았지만 그 숱한 사랑의 낙서들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기적 같은 사랑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설사 헤어졌을지라도 그 사랑의 기억과 흔적은 어딘가 남아 삶의 기적을 증거한다.

#돔에 오르는 길목에서 마주한 화려하고 웅장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천장화는 『르네상스 예술가 열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르조 바사리의 작품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이 소름 끼칠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 숱한 장면들을 텅 빈 허공에서 홀로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한 편의 거대한 시네마스코프를 보는 것으로 착각될 만큼 놀랍고 기적 같은 경험이었다. 아울러 선과 악이 뒤엉킨 우리네 삶에서 몸부림치는 것 자체가 날마다의 일상에서 작은 기적들일지 모른다.

#천장화에서 눈을 돌려 다시 인적 끊긴 더 좁고 가파르다 못해 아찔하게 느껴지는 계단을 하나씩 디디고 돔 위에 오르자 세찬 바람과 함께 피렌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마치 환영처럼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하나는 누군가 여기서 세상을 비관해 뛰어내렸을 것만 같은 찰나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나 자신이 서 있다는 것에 대한 솔직한 감사함이었다. 그저 서 있는 것과 떠밀리든 떨어지든 추락하는 것 사이에는 종이 한 장보다도 작은 차이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각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오후 6시 정각이 되자 피렌체의 모든 교회들이 타종을 했다. 그 순간 산타마리아 노벨라에서 본 마사초의 ‘성삼위일체’ 그림 밑부분의 누워 있는 해골상 위에 적힌 경구가 떠올랐다. “여기 누워 있는 나도 예전엔 너희 모습이었다.” 섬뜩하지만 예외 없는 경고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안다면 우리의 삶은 틀림없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 내가 몸부림치며 버티고 있는 이 순간이 내 삶의 기적 같은 순간들이고 더 나아가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일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사실 그 어떤 각오보다도 위대한 것은 감사다. 앞으로 뭔가를 해내겠다는 각오보다 지금껏 버티고 견뎌온 것에 먼저 감사하자. 닷새도 채 남지 않은 2009년을 보내며 지난 한 해도 내가 다 알지 못했던 크고 작은 기적으로 충일했던 하루하루였음을 스스로에게 잊지 말고 말해주자. 특히 자신이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더 감사하자. 그것이 더 큰 기적을 만들 테니. 물론 삶은 기적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다. 되레 감사함이 기적을 만든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