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대통령만이 풀 수 있는 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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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 일은 대통령만이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료 대란을 풀기 위해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한 배경을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경위야 어떻든 여야 영수가 직접 나서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푼 것은 큰 다행이다.

큰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릴수록 그래서 더욱 이상한 것이 있다.

대통령만이 풀 수 있었던 문제를 두고 왜 정부 안에서는 그간 대통령에게 직언(直言)이 없었느냐는 것이다.

비단 의약분업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대통령만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쌓여가는데, 의약분업처럼 일이 터지기 전에 대통령에게 직언하고 결심을 받아 권한과 소신으로 일을 처리하는 유연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래 전부터 갈등을 빚어온 의약분업이 그랬고,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금융경색이 그렇다.

의약분업 갈등은 진작부터 의료 대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리 결심을 받아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엔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일을 두고. 약사들이 반발하고 환자들이 불편하다고 들고 일어나면 또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인가.

금융경색은 아직 어찌어찌 막고 넘어가지만 자칫하면 금융대란으로 번질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경제위기는 완전히 극복됐다" 는 金대통령의 총선 전 선언에 매여서 그런지 정부는 여전히 "공적 자금 투입은 없다" 는 말을 되풀이하며 오늘은 여기 틀어막고 내일은 저기 틀어막는 편법을 계속 동원하고 있다.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의약분업은 DJ 정권의 대선 공약이었다. 의료개혁을 처음 대선공약으로 내건 대통령 후보는 YS였으나 강력한 드라이브를 건 것은 DJ였다.

DJ 정부 출범 후 의약분업은 개혁의 대표적 표본 중 하나로 앞세워졌고 당(黨) 주도로 밀어붙여졌다.

장관을 비롯한 보건복지부 관료들은 당으로부터의 전화 한통에 수시로 불려가며 당 주도의 의료개혁에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의보통합(지역 의보와 직장 의보의 통합)도 마찬가지였다.

의보통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던 보건복지부 고위 관료가 면직되는 등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의견은 '반(反)개혁' 으로 몰리는 강성 분위기였다.

의약분업이나 의보통합은 이처럼 DJ 드라이브가 걸린 개혁이었다. 그러니 직언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행을 앞두고 이런 저런 문제가 눈에 보일 때는 면직을 각오하고라도 가서 말을 해야 한다.

금융경색도 갈수록 대통령만이 풀 수 있는 문제가 돼가고 있다. 어떻게 보고 받았는지 모르지만 金대통령은 총선 전 "경제위기는 완전히 극복됐다" 고 선언했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고 남북회담에 전념해야 할 즈음, 아직도 30조~40조원의 공적자금이 더 들어가야 할 큰 부실덩어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자금은 계속 투신권을 빠져 은행권으로 옮겨갔다.

남북회담을 전후해 어떻게 이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룰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金대통령이 "경제문제를 직접 챙기겠다" 고 했으니, 장관들끼리 하루 걸러 서로 다른 말을 하던 끝에 "추가 공적자금 투입은 없다" 고 한 입장정리는 그대로 대통령의 뜻이 됐다.

그러니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장들더러 "돈이 투신에서 빠져 은행으로 갔으니 기업들에 돈을 풀어 대라" 는 뜻의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은행의 건전성을 감독해야 할 최고 책임자가.

이후 정부는 벌써 여러 차례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내놓았지만 땜질 처방 수준에 그칠 뿐 금융경색은 풀리지 않고 있다.

남북문제 하나만 해도 대통령 혼자서 걸머지고 풀어가기에 충분히 힘든 일이다.

예컨대 남북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연합제는 아직 국론(國論)으로 확정하는 절차를 밟지 않은 통일 방안이다.

국가간 조약을 맺으면 국회가 이를 비준해야 효력을 발휘하듯 지금까지 비밀리에 추진해온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사항을 우리의 국론으로 뒷받침하는 과정만 해도 金대통령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직언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직언하기가 어렵고 직언할 사람도 없다면 개각을 통해 사람과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방법이다.

개각이 직언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약분업과 금융경색만 놓고 봐도 사람을 바꿔줘야 한다는 '시중의 직언' 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침 총리 서리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끝나가고 있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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