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잃은 것도 많은 의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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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겼지만 졌다."

지난 24일 여야 영수회담을 마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임시국회 회기 내로 약사법을 개정하겠다" 고 발표했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의사협회에서 농성하던 5백여명의 의사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5일 동안 계속된 사상 초유의 의료계 집단폐업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국민의 심정은 착잡했다. 건강연대 강창구(姜昌求)정책실장은 "의사들은 승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국민의 존경과 신뢰' 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다" 고 말했다.

그는 " '의사선생님' 으로 존경받던 그들은 스스로 '의료기술자' 로 자신의 지위를 끌어내렸다.

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가운을 벗은 그들을 이제 누가 신뢰하겠느냐" 고 덧붙였다. 의사들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크다는 얘기다.

25일 찬반투표를 하기 직전 신상진(申相珍)의쟁투위원장은 "폐업은 의권(醫權)쟁취를 위한 의사들의 불가피한 행동이었다" 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누구를 위한 의권인가. 한 네티즌은 "의사들의 폐업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 테러" 라고 흥분했다.

"의사들에게는 음식을 팔지 않는다" 고 써붙인 식당도 있었다.

이는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권리 찾기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도 폐업이라는 극한 상황을 방조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복지부에서 처방료 인상 등 의사들을 달래기 위한 협상안을 내놓은 것은 폐업에 돌입하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폐업할 것이 명백한 데도 "최후 통첩을 했다" 고 물러서지 않았다.

협상력이 부족해 주무 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대통령이 나서야 풀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선례를 남기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의료계는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상당 부분 얻어내고 청진기를 손에 잡았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오는 7월 1일 의약분업 실시에 차질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약사법 개정에 불만을 품고 의약분업 불참을 선언하고 나선 약사회의 불만을 다독거리는 데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앞장서야 한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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