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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와 그림으로 대화한 ‘당돌한 才女’ 링수화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20년 런던에 체류하던 시절의 린창민·린후이인 부녀(위 사진). 베이징 스자후퉁(史家胡同)의 집에서 회화에 열중하는 링수화. 김명호 제공


타고르가 베이징에 도착한 날부터 량치차오와 린창민은 린후이인에게도 통역을 부탁했다. 린후이인은 량치차오가 예전부터 점찍어 놓은 며느릿감이었다. 타고르가 가는 곳에는 영락없이 쉬즈모와 함께 린후이인이 있었다. ‘삼우도(三友圖)’라는 제목을 붙인 세 사람의 모습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남들은 알 턱이 없었지만 쉬즈모와 린후이인은 초면이 아니었다.

1920년 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왔던 쉬즈모는 부모가 정해준 4살 연하의 장유이와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했다.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하러 간다는 것처럼 도망가기에 좋은 핑계거리도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던 중 웰스(H.G. Wells)를 만나면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두안치루이(段祺瑞) 내각의 사법총장직에서 쫓겨난 린창민도 국제연맹 중국 측 대표 자격으로 딸 린후이인과 함께 런던에 와 있었다. 24세의 기혼자 쉬즈모는 린후이인을 본 날부터 잠을 설쳤다. 애정 공세를 퍼부어댔다. 린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대담하기로 이름난 린창민이 쉬즈모에게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량치차오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던지 린창민은 국제연맹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귀국 보따리를 꾸렸다.

모든 게 장유이 때문이라고 생각한 쉬즈모는 장유이를 어르고 달랬다. 온갖 정성을 다하고 지혜를 짜낸 보람이 있었는지 중국 민법에 이혼 조항이 생긴 이래 최초의 현대식 이혼에 성공했다. 쉬즈모는 당사자와 증인들의 도장이 찍힌 서류를 보물처럼 들고 귀국했다. 베이징에 와서 보니 린후이인이 량치차오의 아들 량스청(梁思成)과 열애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린후이인을 직접 찾아갔지만 일이 간단치 않았다.

방황하는 쉬즈모의 앞에 또 한 명의 재녀가 나타났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하얼빈 경찰국장 왕껑(王庚)의 부인 루샤오만이었다. 후스(胡適)의 소개로 쉬즈모를 알게 된 왕껑은 “내가 베이징을 비우는 동안 집사람을 잘 부탁한다”는 싱거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두 사람 앞에서 해대곤 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아이젠하워와 한방에서 지냈던 이 우수하고 단정한 직업군인은 하얼빈과 베이징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루샤오만은 불란서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18세 때부터 외교사절들의 통역을 도맡아 했고 경극과 시·서·화 모두에 능했다. 춤도 일품이었다. 쉬즈모와 루샤오만은 처음 만난 날부터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도 남을 행동을 했지만 순조롭게 풀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타고르의 중국 방문 시기는 쉬즈모의 머릿속이 린후이인과 루샤오만으로 인해 한참 복잡할 때였다.

이때 또 한 여인이 등장했다. 타고르가 옌징(燕京)대학을 방문하던 날 학생을 대표해 일행을 맞이한 여학생이 후일의 ‘낙가산(珞<73C8>山) 3걸(三傑)’ 중 한 사람인 링수화(凌叔華)였다. 링은 베이징시장에 해당하는 순천부윤(順天府尹)과 직례포정사(直隷布政司)를 지낸 고관의 딸이었다. 유년기에 서태후의 궁정화가와 천스쩡(陳士曾)·왕주린(王竹林)에게 그림을 배웠고, 학계의 괴걸 구홍밍(辜鴻銘)은 영어 가정교사였다. 캉여우웨이(康有爲)·위취웬(兪曲園)·치바이스(齊白石)·천인거(陳寅恪) 등 당대의 명류들 치고 그의 집 문턱을 드나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0대 초반이었지만 말과 행동거지가 예술과 교양덩어리였다. 이날 링수화는 30여 명을 모두 집으로 초대했다. 당돌한 제의였지만 타고르가 수락했다.

궁정식 정원이 펼쳐진 거실에 정좌하자 링수화가 타고르에게 물었다. “시에 관한 얘기들은 많이 나눴을 테니 오늘은 그림이나 그리며 놀자. 그림을 좋아합니까?” 일행들은 기겁을 했지만 링은 개의치 않았다. 타고르는 유화 1500여 점을 남긴 화가이기도 했다. 불상과 연꽃을 그렸다. 링도 국화 9송이를 그려 화답했다. 쉬즈모·후스·쉬베이홍(徐飛鴻)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쉬베이홍은 타고르에게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이날 그 자리에는 린후이인도 있었고 장차 링의 남편이 될 천위앤(陳原)도 있었다. 후일 링수화는 “너무 어렸다. 기가 워낙 성하다 보니 위아래도 없었고 무례했다. 생각하면 자꾸 얼굴이 화끈거린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제일 멀쩡한 사람은 타고르였다. 링수화의 집을 나오며 주변을 힐끗 보더니 남들 몰래 쉬즈모의 귀에 대고 “린후이인보다 나으면 나았지 빠지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쉬즈모의 부친도 타고르에 못지않았다. 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자 재산 3분의 1을 “내가 결혼을 승낙한 며느리에게 해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며 장유이에게 줘 버렸다. 조리사만 800여 명을 둔 반찬가게와 간장공장을 운영했고 상하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당포와 전구공장을 소유한 거부였다. (계속)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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