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열린 사회의 알 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민주주의는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든 결정을 내리려면 고통스러운 토론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정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의 입장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하고, 때로는 논리적 허점과 심지어 이기적인 타산까지 노출돼 사회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토론을 통해 도달하는 합의는 그러나 밀실에서 내린 결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추진력을 갖는다. 1980년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전두환씨는 7년 임기 내내 정통성의 위기를 껴안고 지내야 했다. 87년 또다시 밀실선거를 유지하기로 한 4.13 호헌조치는 결국 엄청난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현 정부는 이같은 열린 사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바탕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험난한 직접선거 과정을 통해 집권했기에 역시 당당하게 햇볕정책을 추진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민족사를 바꿀 수 있는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정상회담 과정은 서울에 모여 있던 전세계의 미디어를 통해 각 나라로 알려졌고, 그로 인해 우리 시민과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자.기업인들은 북한과 북한의 지도자, 또 남북한 관계에 대해 생각을 바꾸게 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신뢰가 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작용을 두려워해 영상을 차단하고 취재를 봉쇄했다면 이러한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또는 대북 정책의 보도를 둘러싸고 정부가 취하는 행동은 지나치게 폐쇄적 자세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단적인 예가 중앙일보 기자의 무기한 청와대 출입정지 조치다.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면, 문제가 된 노동당 규약 개정에 관한 사안은 모두 세 곳에서 논의됐다.

한 곳은 여의도 63빌딩의 일식집에서 있었던 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인 학계 인사와 민주당 386 의원들의 조찬 세미나에서였고, 두번째 장소는 청와대의 언론사 사장단 만찬장이었다.

또다른 한 곳은 한나라당 당사였다.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영수회담 내용에 그같은 사안이 포함됐다는 내용을 한나라당에서 기자들에게 확인해 준 것이다.

정부가 중앙일보 기자의 청와대 출입을 제한하는 이유는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그렇게 약속했다면 해당 기자와 신문사가 함께 짊어져야 할 도덕적인 짐이다. 취재원에 대한 성실성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동시에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는 김정일 위원장의 노동당 규약 개정 의지와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보가 정치 엘리트들과 언론사 사장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그같은 내용이 사실이고 국회의원과 언론사 사장은 알아도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정보를 과점할 권리는 누가 부여하는가. 그들까지만 알아야 한다는 한계는 또 누가 설정하는가.

기자는 독자로부터 알 권리를 대표해 달라는 특권을 제도적으로 부여받은 직업인이다. 그래서 항상 독자에게 취재한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감을 벗을 수 없다. 20일 아침 63빌딩 조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기자도 이같은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보도(非報道) 약속을 했지만 국민의 알권리가 더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개인적으로 심각한 윤리적 부담을 수반한다.

열린 사회를 희망하는 많은 독자는 힘있는 취재원과 유착하는 기자보다 지식과 정보의 엘리트 독점구조를 해체해 알 권리의 지평을 넓혀 주는 기자가 많아지기를 고대한다. 국민이 중요한 사실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단기적으로 정책 추진에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의 열린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줄 것이 틀림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국정의 중요사를 터놓고 설득해온 개방형 지도자다.

국민의 정부가 특별히 북한 관련 사안이라고 해서 이같은 정책 방향을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바꾸지 않기를 바란다.

이재경 <이화여대교수.언론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