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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홀대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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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5년 가을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신한은행에 예치돼 있다"고 폭로하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소문만 무성했던 비자금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정국을 벼랑으로 내몬 것은 물론 은행 측도 코너에 몰렸다. 은행장의 퇴진까지 거론됐다. 서슬 퍼런 실명제를 어기면서 차명계좌를 관리해줬다는 의혹을 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은행 감독당국 관계자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이들은 "진정한 뱅커(은행원)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라응찬 행장은 30~40년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뱅커다"면서 행장을 감싸고 돌았다. 사람 귀한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런 분위기 덕에 라 행장은 살아남아 오늘의 신한 금융그룹을 일궈냈다.

한참 지난 얘기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인재를 너무 소홀히 취급한다. 인재를 키워 스타로 만들기보다는 생채기 내기에 급급하다. 그러니 가뜩이나 얕은 인재 풀이 말라간다.

93년 재산공개 파동 때는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으로 많은 인재가 곤욕을 치렀다. 단순히 상속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옷을 벗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전문관료들도 항상 불안하다. 협상 결과가 좋지 않거나 대형 사고, 천재지변이 생기면 주무부처 장.차관이 여론 무마용으로 '희생양'이 된다. 문민정부는 쌀 협상 책임을 물어 농림부 장.차관을 2명씩 경질하고 1급 이상 전원을 교체했다.

미국은 영 딴판이다. 9.11 테러로 수천명이 죽어도 어떤 장관의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러자 주무장관들은 사후 수습과 재발방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 정부는 어떤가. 새 정부 출범 후 지금까지 18명의 장관이 교체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전 "장관들은 2년 이상 임기를 같이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웬걸.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관은 단 둘에 불과하다. 지난 4.15 총선에선 전문관료까지 총선에 차출했다.

최근엔 100만원을 받았다 해서 농림부 차관이 물러났다. 이쯤 되면 엄청 깨끗한 나라이고, 외국인들이 투자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농림부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요직을 두루 거친 농정 전문가란 점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징계위원회를 열어 사안의 경중을 따져 본 뒤 사표를 수리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쫓기듯 사흘 만에 옷을 벗겼다. 이 때문에 쌀 개방 협상, 추곡수매 제도 개선 등의 차질이 우려된다고 한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사표 수리가 안타깝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모기 잡는 데 도끼를 쓰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북한 경비정의 무선송신 내용 등을 언론에 제공했다가 물러난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중장)만 해도 그렇다. 유능한 정보통이자 부하들의 신망도 두터웠지만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 졸지에 군을 떠났다.

정부만 그런 게 아니다.

축구계는 조급증에 빠진 탓인지 국제대회에서 몇차례만 져도 국가대표 감독을 갈아치운다. 부임한 지 14개월 만에 한국 대표팀을 떠난 움베르투 코엘류 전 감독은 "부임 이후 단 72시간만 훈련했다"며 섭섭함을 표시했다.

이처럼 우린 큰일만 생기면 책임자를 문책하는 데 급급했다. 아까운 인재를 너무 쉽게 날리고 그 방식도 거칠기 짝이 없다. 이런 척박한 풍토에선 인재가 쑥쑥 자랄 수 없다. 인재를 아끼는 분위기를 조속히 만들자. 국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도.

박의준 정책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