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의 세계] 64. 행주좌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좌선(坐禪)은 글자 그대로 앉는 것(坐)을 기본으로 한다. 대개의 경우 맨바닥에 앉지 말고 방석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한장의 방석으로 엉덩이 쪽을 높여 자세를 바로 잡도록 권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달마가 면벽좌선한 그림을 보면 좌법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달마는 차디찬 바위 위에서 수행했는데 결코 방석같은 것을 깔고 앉지 않았다. 달마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달마와 바위가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위가 달마이고 달마가 바위인 일체(一體)가 이뤄지면 아무런 고통이나 느낌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달마의 좌선이 오로지 좌법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좌선의 테두리에는 이른바 '행주좌와(行住坐臥)' 가 포함된다. '행' 이란 걸으면서 수행하는 행선(行禪)의 준말이다. '주' 란 한곳에 머무는 것(住), 곧 서서 수행하는 입선(立禪)을 뜻한다. '좌' 는 물론 앉아서 수행하는 것을 이름하는 것이고, '와' 는 누워서 수행하는 와선(臥禪)의 준말이다.

행선은 흔히 경행(經行)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한데 행선 곧 경행에 관해선 적지 않은 오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좌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다리의 피로를 풀기 위한 걸음걸이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행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걸으면서 숨고르기와 마음 다스리기가 동시에 이뤄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경행, 즉 행선의 진면목이다. 그런데 경행의 방법은 일정치가 않다.

대개 일식반보(一息半步)라고 해서 한 호흡에 반 걸음씩 걷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귀가에 바람소리가 일도록 빠른 걸음으로 하는 경행도 있다. 달마의 행선은 바로 후자였다고 한다.

행선은 흔히 전통선의 전매특허인양 일컬어진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칸트의 시계바늘같은 산보도 행선의 좋은 본보기다.

칸트의 사색(思索)과 철학은 규칙정연한 산책 곧 행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규행 <현묘학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