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윤 육사교수 '한국전쟁…' 세미나서 밝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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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 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시인 박인환(1926-56)에 대한 평론가들은 평가는 인색하다.

'서구 모더니즘의 아류' '뜻이 모호한 감상주의' 라는 혹평도 적지않다.

육군사관학교 김종윤(51.현역 대령.국문학 박사)교수가 이런 일반적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며 "박인환의 시는 6.25라는 전쟁에서 비롯된 시대의 비애와 고뇌를 반영한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3일 '한국전쟁과 한국문학' 이란 주제로 육사에서 열린 6.25'전쟁'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이런 내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김교수는 먼저 "박인환의 시가 전쟁을 전후해 달라졌다" 는 점을 강조했다.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풍경을 동경하는 시어(詩語)들은 바뀌지 않았지만 6.25 이전에 보이던 '밝은 희망' 이 전쟁 이후 작품에서는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눈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밤이면 열차가 지나온/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혜성보다도/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 '열차' 중)

6.25직전인 49년에 발표된 시는 곳곳에서 밝은 희망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희망은 시인이 종군기자로 6.25를 겪은 이후 찾아보기 힘들다.

김교수는 "전쟁의 폐허속에서 인간은 불안과 공포의 세계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며 "박인환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상실한 5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죽음과 절망을 노래하게 됐다" 고 설명했다.

즉 박인환의 시세계는 '저급한 센티멘탈리즘' 이나 '모더니즘의 아류' 가 아니라 '전후 민족 모두의 불안의식' 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전후 박인환 시세계의 핵심을 '소멸(消滅)이미지' 와 '유예적 어법' 의 두 가지로 요약했다.

'소멸 이미지' 란 곧 어디론가 떠나고 사라지는 이미지, 곧 죽음이다.

'목마와 숙녀' 의 경우 첫머리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한 영국의 여성작가. 시 전반에 걸쳐 죽음과 이별은 반복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이제 우리는 작별해야 한다" 등. 주어가 불명확하고 뜻이 모호할지언정 '소멸의 이미지' 만은 한결 같다.

'유예적 어법' 이란 어떤 확신이나 단정을 못하고 망설이는 표현이다.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와 같은 구절이 그 예다.

김교수는 "박인환의 시세계를 개인적 감성의 차원으로 봐서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전쟁이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고, 시인은 시대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기에 6.25와 박인환의 시는 분리될 수 없다" 고 강조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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