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승희 '아네모네 꽃이 핀 날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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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렇게 신기(神氣)가 오릅니까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토록 검은 질료에서 주황빛 신이 불려나옵니까

옛날부터 늘 그래왔습니까

목숨을 지나서도 타오르는

무슨 한 덩어리 불이 있겠습니까

너무 모욕을 받았는데 너무 큰 모욕이 지나갔는데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 김승희(48) '아네모네 꽃이 핀 날부터' 중

꽃이 피어나는 것도 사랑이 있어서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서도 이 시는 되풀이해서 물음을 던진다. '죽도록 사랑하면' 이라는 전제는 왜 한번으로는 안되는지? 그렇지 않고서는 꽃이 피어날 수 없는 것인지? 김승희가 보는 아네모네는 한 덩어리 불로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욕으로까지 이르러 살아있음의 고통을 꽃으로 하여금 짊어지게 한다. 엎드린 기도가 길다.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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