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광장] 공산당의 달러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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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공산당이 살아 남으려면 시대에 맞게 변신해야 한다. "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수가 지난 20일 공산당 총회에서 한 말이다. 물론 그 정도면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곧바로 "이제 달러는 프롤레타리아의 적(敵)이 아니라 무기" 라고 선언했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와 돈(자본)은 항상 적대적이라고 가르쳐온 게 러시아 공산당이다.

하지만 이제는 공산당 당수가 앞장서 '돈과 자본의 화해' 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주가노프는 한술 더 떠 돈을 정의하는 단어로 러시아 화폐인 루블 대신 달러를 사용했다.

아무리 루블의 가치가 바닥이라지만 달러가 '정치 권력자나 재벌.마피아들이 빼돌리는 의혹의 재산, 외국의 투기자본' 을 상징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보여온 공산당의 그동안의 태도를 고려하면 충격적이다.

"유럽에서 가장 단단한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 조차 이념의 낡은 껍질이 깨져나가고 있다" 분석이 나올 만하다.

주가노프의 이날 발언은 대통령선거 패배의 책임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배경이 무엇이든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그같은 발언은 공산당 및 좌파 내 보수.개혁세력들을 모두 들쑤셔놓았다.

보수파는 "공산당이 비록 집권당은 아니지만 유급당원만 해도 아직 50만명이고 러시아 연방 전역에 지구당을 두고 있는 유일한 정당" 이라며 주가노프가 그러한 당과 당원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격노했다.

또 개혁파는 "러시아에서 공산당은 이제 이름뿐이며 공산당이란 이름에 싫증을 느낀 당원들도 많다. 당명뿐 아니라 강령.구조 등을 완전히 탈바꿈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참패할 것" 이라며 주가노프의 발언이 "변혁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는 언어적 수사였다" 고 비난했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공산당만의, 공산당을 위한 몸부림일 뿐" 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정치분석가들은 "공산당이 제대로 변신하지 못한다면 '애국.민족주의' '강성대국' 을 부르짖는 푸틴이 그동안 공산당의 기반이었던 보수.회귀주의 세력마저 빼앗아갈 상황" 이라고 분석했다. 현실정치와 이데올로기 모두에서 러시아 공산당의 생존은 이제 기로에 선 양상이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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