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컬럼] 정치 유죄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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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야당을 한다고 목청이 터져라 공약한 사람들이 갑자기 여당이 돼 버리지 않나, 국무총리의 숨겨둔 부동산이 들통나지 않나, 여기에다 386정치인들의 광주 술판 소식이 들리고 명성 높은 시민운동가의 성추행과 국책연구기관장인 경제학박사의 성추문논란까지 들려오는 판이다.

얼마전 대통령이 국정에 대한 국민의 피로를 걱정했는데 이런 지도층의 도덕성 추락과 신뢰상실이야말로 국민을 가장 피로하게 만드는 근본원인일 것이다.

왜 이런 사건들이 줄줄이 터질까. 이 시대 지도층이 더 도덕적으로 저열(低劣)해서인가, 이 시대 사회분위기가 더 사람을 타락시키기 때문인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런 지도층의 도덕성 추락 현상은 결코 우리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정치란 사회의 규범을 만들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옳고 저렇게 하면 처벌된다, 이런 일은 상을 받고 저런 일은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을 정치는 입법.행정을 통해 국민에게 제시하고 강제한다.

그런 정치가 썩고 왜곡되고 이중적이 되면 따라서 사회도 국민도 썩고 왜곡되고 이중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사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당사자들이 모두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점이고, 그들의 겉을 보고 걸었던 기대와 신뢰가 무너진 데서 국민은 충격과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말한다면 사회 여러 분야 중에서도 정치쪽이 가장 심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근검.절약과 새마을정신이 어떻고 하면서도 뒤로는 국가공권력으로 여자를 데려다 술을 마셨다.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웃기게도 사회정화위원회까지 구성했지만 뒤로는 막상 자기들이 수천억원대 뇌물을 챙겨 사회를 혼탁케 만들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본인은 한푼도 안 받았다고 자랑하지만 그 아들.측근.부하들이 얼마나 썩었던가.

멀리 볼 필요 없이 당장 요즘 일들을 보라. JP나 이한동(李漢東)씨의 처신은 집단식언(食言)아닌가. 4.13총선에서 야당을 한다고 그렇게 떠들었으니 자민련이 얻은 표는 야당표 또는 최소한 비(非)여당표라고 해야 말이 맞다.

그런데 야당표를 받아 여당으로 간다? 세상에 이런 정치논리가 있을 수 있는가. 야당인 줄 알고 자민련을 찍은 유권자는 이제 누구에 의해 대변될 것인가.

JP는 "도대체 17명만 당선될 줄 누가 알았겠나" 하고, 그러니까 이제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가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책임져야 할 자민련 참패를 들어 바른 것을 찾는 구시(求是)가 아니라 총리직이나 교섭단체구성 등 이익을 찾는 구리(求利)를 하자는 것 아닌가.

이런 신용도 없고 자기말도 못 지키는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국민을 '지도' 하고 있으니 사회에 도덕과 기강이 설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자민련을 끌어들여 자기 말도 못 지키게 만들고 수(數)의 우위 곧 힘의 우위를 추구하는 DJ의 노선도 정치 도의상 문제가 없는 것인가. 대화정치를 다짐한 야당과의 약속은 살아 있다고 하는데 이는 군사력을 증강하면서도 평화합의는 유효하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렇게 오랜 세월 축적돼 온 정치의 비도덕성.이중성이 우리 사회와 국민의식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어느 나라든 지도층은 그 사회의 모범이다.

국민은 지도층을 모방하고 그들의 처세와 언동과 사고방식에서 배우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겉 다르고 속 달라야 출세하고 치부한다고 국민에게 가르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이나 식언 따위는 수시로 해도 괜찮다고 교육을 시켜온 셈이다.

그런 정치와 그런 지도층에서 도덕적 긴장이 있을 리 없고 그 중에선 부적절한 술판이나 성추행도 나오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모두 정치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정치주역들은 깊이 자성해야 할 것이다.

자기들이 보인 이중성.신뢰상실 등이 전체 사회의 도덕적 해이.기강문란.도덕적 허무주의 조장 등과 무관치 않음을 느껴야 한다.

비록 광주 술판이나 성추행과는 직접 인과관계가 없더라도 자기들이 정치를 하고 있는 이 시절에 왜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는지를 괴로워하고 자기 도덕성을 좀더 세워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최소한 보여야 옳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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