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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밀사 평양밀사] 4.85년 장세동 평양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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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8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평양 주석궁(현 금수산기념궁전). 대북 밀사 장세동(張世東)안기부장은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환영인사가 있은 뒤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全대통령께서 먼저 평양을 다녀가시면 이른 시일 내에 주석님을 서울로 초청해 남쪽의 실상을 직접 보실 수 있도록 어디든지 안내를 하시겠다고 합니다. "

金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장세동은 "이런 좋은 기회는 또다시 오기 어렵습니다" 라며 말을 이어갔다. 최근 공개된 김일성-장세동 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金주석은 '정치적 대결 지양이 우선 중요하다. 연방제가 될 때 강대국의 대변인 노릇을 안하게 된다' 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어 金주석은 걸걸한 목소리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말씀 중 감명깊게 들은 것은 내가 더 늙어 죽기 전에 통일하자는 것인데, 나는 아직 건강하므로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한달전 서울을 방문한 허담(許錟)노동당 대남비서에게 全대통령이 "그 어른(金주석)도 건강이 좀 좋으실 때 여기 오셔서 여행도 하시라" 고 말한 것을 그대로 전한 모양이었다.

장세동 일행이 2박3일 일정으로 평양 방문길에 오른 것은 85년 10월 16일. 박철언(朴哲彦)안기부장 특보.강재섭(姜在涉)안기부 연구실장 등 4명이 그를 수행했다.

당초 9월 22일 방북 예정이었으나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이 9월 17일자 1면 머릿기사로 허담의 서울 밀행을 보도하자 양측은 평양 방문을 미뤘던 것이다.

밀사 파견을 며칠 앞두고 우리측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열린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정상회담을 신중히 추진하자' 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노신영(盧信永)국무총리를 비롯, 장세동 안기부장.박동진(朴東鎭)통일원장관.이규호(李奎浩)대통령 비서실장 등 권력 핵심들이 참가했다.

당시 회의를 주재한 盧총리(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의 증언.

"북측이 현 체제를 고수하는 한 정상회담을 연다 해도 별다른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했어요. 그래서 섣불리 정상회담을 추진하기보다 북측이 정상회담에 관심을 보이는 속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張부장에게 주문했지요. "

정상회담 성사에 집착하던 종전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장세동은 이 주문을 염두에 두고 북측과의 회담에 임했다.

평양 방문 첫날인 16일 허담과 만난 자리에서 장세동은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불가침 선언을 하되 주변 4강과 교차수교가 이뤄져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허담은 "교차승인은 두개의 조선을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 며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이 교차승인을 맹렬히 반대할 때였다.

장세동-金주석 회담에서도 양측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金주석은 "우리끼리 평화적 방법으로 민족대단결 원칙하에서 통일하자" 며 7.4공동성명의 통일 3대 원칙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일본 사람이 조선을 지배할 때도 3개 사단밖에 주둔하지 않았다" 며 "군대수도 각각 10만명으로 줄이자" 는 주장을 반복했다.

金주석은 회담후 가진 오찬에서 올림픽 공동주최 및 단일팀 구성을 추가 제안했다. 정상회담의 단기 목적이 무엇인지 슬쩍 내비친 것이다. 장세동은 주저하지 않고 "국제올림픽헌장이 있어서 어려울 것으로 본다" 며 완곡히 거절했다.

두차례의 밀사 접촉을 통해 남북한은 서로 입장차를 확인했고 정상이 만나더라도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리게 된 듯하다. 장세동 일행이 귀환한 뒤 서울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정상회담 무용론이 제기되고 미국의 견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박철언 특보(현 자민련 의원)의 증언.

"평양에서 돌아와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어요. 우리가 평양에 가 있는 동안 정부 안에서 여러 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저는 남북한 비밀접촉에 대해 미국측에 정보를 주지 않아 여러 가지 오해와 견제를 받았지요. "

북한은 그해 말 민추협이 주도하는 개헌운동으로 서울 정국이 불안해지자 이듬해 1월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을 빌미로 모든 남북회담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적십자.경제.국회회담 등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대남 비난공세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밀사 왕래도 자연히 중단됐다. 全대통령은 박철언-한시해(韓時海)노동당 부부장 라인을 계속 가동시킴으로써 정상회담에 대한 미련을 보였으나 임기 내에 회담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때 마련된 대화 채널이 훗날 6공의 밀사 왕래를 성사시키는 접촉점이 됨으로써 정상회담 추진은 다음 정권으로 이어진다.

이동현 기자

◇ 관계기사 열람은 조인스닷컴 홈페이지(http://www.joins.com)의 '남북정상회담' 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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