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사 평양밀사] 2. 이후락의 북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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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72년 5월 4일 0시 15분쯤. 평양 모란봉초대소.

대북 밀사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은 순간 깊은 잠에 들었다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깼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유장식(柳章植)노동당 연락부장은 "부장 선생, 빨리 옷을 입으시오. 갈 데가 있소" 하며 재촉했다.

이후락은 당황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유장식을 따라나서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한 청산가리가 양복주머니에 제대로 있는지를 거듭 확인했다. 그를 태운 차량은 모란봉 오솔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유장식은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긴 침묵만 흘렀다. 이윽고 차가 멈추자 유장식은 그제서야 "부장 선생, 여기가 수상 관저입니다" 고 말했다. 이후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락과 김일성(金日成) 당시 수상의 심야 회동은 북측이 언제나 '계산된 돌발행동' 으로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북측은 전날 낮에 있었던 이후락-김영주(金英柱)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의 2차 회담보다 심야 회동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수상은 이날 회담에서 이후락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金수상은 이후락에게 '민족의 영웅' '최고 애국자' 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미국.일본 앞잡이' 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金수상은 뜻밖에 '1.21 청와대 기습사건' 에 대해 사과하는 발언도 했다. 이때 배석했던 정홍진(鄭洪鎭)중정(중앙정보부)협의조정국장의 증언.

"김일성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며 청와대 사건이던가, 그것은 朴대통령께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입니다 라며 사과했어요."

金수상은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자 "외세를 배격하고 서로 싸움하지 말며 민족이 단결하자.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이런 것은 다 덮어두자" 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뒷날 7.4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원칙이 이날 심야 회동에서 불쑥 나왔다. 이후락은 이 제안에 깔려 있는 복선을 생각할 짬도 없이 덥석 받아들였다.

5월 4일 오후 이후락은 金수상과 또 한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金수상은 심야에 언급한 3대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이날 저녁 '적지' 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귀환한 이후락은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수고 많았다" 고 짧게 위로했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고 한다. 이동원(李東元)전 외무장관은 훗날 朴대통령의 심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이북이 얘기하는 자주는 미국 나가라는 소리 아닌가. 아무래도 이후락이 이북에 가서 놀림당하고 온 것 같아'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중정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鄭국장이 간부들 앞에서 방북 결과를 보고하자 일부 간부는 "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자주'가 통일 원칙의 첫머리에 들어간 것은 잘못됐다. 게다가 민족대단결까지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전략에 넘어간 것 아니냐" 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극비리에 성사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박성철(朴成哲)부수상 일행은 5월 31일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후락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이었다.

朴대통령은 박성철에게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부터 잘해 남북간에 쌓인 장벽과 불신감을 해소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박성철은 정치협상을 하자는 金수상의 뜻을 전달했다.

金수상이 朴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촉구했음이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의 문서로 확인된다. 이후락은 "남북간에 신뢰가 쌓이고 여건이 성숙됐을 때 정상회담을 하자" 며 완곡히 거절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밀사 왕래의 성과는 남북 최초의 합의문서인 7.4공동성명으로 나타났다. 그 뒤 남북조절위원회와 적십자회담이 이어져 화해의 물꼬를 트기 위한 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접촉이 거듭될수록 경제.사회문화 교류를 통한 상호 신뢰회복의 선결을 강조한 남측 입장과 평화협정 체결, 군비 축소 등 정치.군사문제 우선 해결을 주장하는 북측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남북한 당국이 타협점을 찾지 못한 가운데 73년 8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 이 터지자 북측은 이를 구실삼아 돌연 모든 대화를 중단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朴대통령과 金수상의 상봉이 불발로 끝난 지 27년 만에 김대중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데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이동현 기자

◇ 관계기사 열람은 조인스닷컴 홈페이지(http://www.joins.com)의 '남북 정상회담' 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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