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EU 의장국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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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유럽연합(EU)창설 50주년을 맞은 9일. 프랑스 내각의 두 간판 스타 로랑 파비우스 재무장관과 자크 랑 교육장관이 파리 시내의 한 중학교 교실을 찾았다.

랑 장관은 호기심 머금은 학생들의 눈망울에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보다 조금 많은 나이에 총리를 지내신 훌륭한 파비우스 재무장관을 소개합니다."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파비우스 장관은 칠판에 '1백프랑' 이라고 쓴 뒤 유럽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EU는 50년 전 오늘 장 모네라는 사람의 아이디어로 탄생했습니다. 헷갈리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클로드 모네는 화가지만 EU의 할아버지격인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를 만들어낸 이 사람의 이름은 장입니다." 또 한차례 폭소.

"여러분들이 독일을 여행하면서 가게에서 빵을 사고 1백프랑짜리 돈을 내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예요. 그럼 프랑을 뭘로 바꿔야 할까요."

"도이체 마르크. " 한 학생이 성큼 대답했다.

"맞아요. 만일 EU의 15개 회원국을 여행하려면 열다섯번이나 돈을 바꿔야 하고 환전 수수료를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죠.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모두 유로화를 쓰면 고스란히 1백프랑어치 물건을 살 수 있는 거죠."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 1시간 가까운 강의를 마치고 두 장관은 이번엔 자신들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국회로 향했다.

두 장관의 강의는 밝고 희망찬 유럽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7월 1일부터 순번제 EU 의장국을 맡게 되는 프랑스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럽공동방위, 단일화폐 유로화의 정착, EU 국경 확대와 그에 필요한 각종 제도 개혁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는데 15개 회원국 모두가 골치 아픈 문제는 먼저 제기하길 꺼리고 있는 게 EU의 현실이다.

유럽중앙은행의 개입 선언에도 불구하고 파비우스가 학생들에게 자랑하던 유로화는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하고 있다.

유럽통합에 대해 장래의 '유럽시민' 들의 관심도 점점 시들해지는 추세다.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는 사상 최악의 기권율 속에서 치러졌다.

EU 50주년 기념행사도 프랑스에서만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별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두 장관이 중학교 강의를 마치고 참석한 국회.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EU의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의원들에 맞서 "유럽이 효율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의장국 프랑스의 목표" 라고 단호하게 천명했다.

하지만 그같은 야심의 실천방안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게 EU 의장국이 된 프랑스의, 그리고 조스팽 내각의 고민인 것이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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