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재 출연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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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와의 줄다리기 끝에 현대가 정몽헌(鄭夢憲)회장 개인 소유의 주식 1천억원어치를 현대투신에 출자하고 현대 계열사 보유 1조7천억원 상당의 주식을 담보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증자.외자유치 등의 경영개선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이 담보로 부실을 메우겠다는 뜻이다.

정부측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현대투신 부실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 가닥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자구책(自救策)의 신뢰도에 대한 시비는 남아 있지만 현대 쇼크가 금융시장에 미친 충격을 감안할 때 이 정도로 사태가 수습된 게 일단은 다행이다.

이제 현대가 할 일은 경영개선 작업을 서두르는 것이다.

고비는 넘겼다지만 아직 현대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현대는 최대한 투명한 방법으로 투신사 부실을 조기에 해결, 이런 의혹을 씻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지배구조 등 그룹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은 서둘러 개선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만의 하나 이번 조치를 위기 모면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생각한다면 시장의 냉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부도 이런 계획이 순조롭게 추진되도록 간접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편 현대투신 부실 문제가 재연하지 않도록 현대가 내놓은 자구책이 실현 가능한지, 담보는 타당한지 등을 철저히 점검해 국민 부담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대투신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최대 현안인 금융산업 구조조정도 물 건너 가게 될 것이다.

한편 이번 일을 계기로 기업 부실과 오너의 '사재(私財)출연' 에 대해 분명한 원칙을 세울 것을 정부에 촉구한다.

이번 현대 건(件)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현대가 미리 해결책을 내놓았어야 마땅했다.

밀리고 밀려 마지못해 사재 출연을 한 형국이 돼선 사재 출연 자체가 별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만 터졌다 하면 무조건 '사재 출연' 운운하면서 포퓰리즘에 편승해 여론몰이를 하고, 뒤에서 재벌 팔을 비틀어 개인 재산을 내놓게 하는 정부 행태 또한 분명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정부는 말로는 '오너 체제' 를 부인하면서 급한 일이 생기면 오너에 의존하는 꼴이 되고 있다.

현대가 계열사 주식 1조7천억원어치를 담보로 내놓은 것도 따지고 보면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오너의 독단인데, 이는 결국 정부가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너의 독단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되, 무조건 사재와 연결시키는 이중적인 행태는 중단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비경제적 논리에 따라 부실기업을 특정 업체에 억지로 떠맡기는 일이 없어야 이번 같은 시비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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