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유럽 인문정신의 씨 뿌린 고대 그리스, 비결은 쉬운 알파벳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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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교양의 탄생
이광주 지음, 한길사
840쪽, 2만7000원

국내에선 드물게 유럽 지성사와 문화사를 천착해온 노 서양사학자의 ‘내공’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기원 전 그리스에서 20세기 프랑스까지 유럽의 인문학 계보를 살폈는데 고대와 현대, 그리고 문사철(文史哲)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람강기에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를 다룬 첫 장(章)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68혁명’을 다룬 마지막 장에선 소설가 카뮈와 더불어 미국의 뉴레프트 운동 지도자 오글스비,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가 나란히 등장하는 식이다.

지은이는 우선 책머리에 유럽의 경우 교양은 옛 그리스로마의 고전 중심의 인문학적 배움과 취향이며 교양인은 고전에 밝은 사람이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교양에 관한 지은이의 생각은 열려 있다.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을 뜻하건대 교양인은 바로 마음을 ‘경작(cultura)’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topos·공간)를 마련한다”며 경계를 짓지 않는다.

그런 만큼 지은이의 통찰은 예리하다. 그리스적 교양의 탄생은 알파벳과 폴리스의 자유 덕으로 돌리는 대목이 좋은 예다. 상형문자를 쓰던 다른 고대문명과 달리 익히기 쉬운 음절문자를 썼기에 지식의 소통 폭이 넓어져 자유로운 담론문화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플라톤의 철학과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이 그리스 교양의 양대 기둥을 이뤘으며 이것이 로마제국의 철학자 키케로에 의해 후마니타스(지·知)로 통합되는 과정이 눈에 보이듯 서술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마에선 기원전 3세기 중엽에 학교가 처음 세워졌는데 교사 대부분이 그리스 태생의 노예 혹은 해방노예였기에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는 현인으로 대접받던 그리스의 교사들과 달리 낮았단다. 심지어는 그리스 풍의 만연을 우려한 원로원이 기원전 161년 모든 그리스 출신 교사를 추방하기로 결의했다는 이야기에는 실소가 나온다.

중세 대학의 탄생을 거쳐 르네상스 교양계층의 성립, 18세기 ‘백과전서적 교양인’에서 20세기 ‘교양있는 좌파’까지 유장하게 펼쳐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약간은 버겁다는 생각과 함께 교양이란 것이 과연 실용적 기예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12세기 이슬람의 한 시인이 잘 갖추어진 궁정은 서기· 시인· 점성가· 의사란 네 가지 유형의 지식인 혹은 교양인을 거느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대목을 보면 특히 그렇다.

어쨌거나 지은이는 교양인이란 특정 이데올로기에 함몰되는 지식인과 다르고, 자기 실현 또는 자기 완성을 이루려는 개인주으자이자 ‘사교적, 사회적’ 존재라는 시각을 바탕으로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을 살핀다. 인문학이 스러지면서 인간상실이 날로 심해진다는 위기론이 나오는 21세기에 한 번 읽어볼 책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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