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에 비친 총선 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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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 학교 회장 선거 때에는 피자를 사주겠다고 한 2명이 탈락했다. 그리고 모두들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돈을 쓰는 후보도 문제지만 음식을 먹고 표를 찍는 어른들이 더 한심스럽다. " (서울 A초등 5학년 李모군)

"국회의원 후보 아저씨들은 서로 자기가 잘났다며 상대 후보를 헐뜯는데 정말 가관이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이 과연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가슴이 쓰리다. " (서울 B초등 6학년 李모양) 어린 학생들의 눈망울에 비친 총선 모습은 곱지 않다.

인간성회복추진협의회(인추협)가 지난달 8일부터 전국 2백27개 선거구의 초.중.고생 6만5천여명에게 배포한 '총선 일기장' 에는 어른들의 추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상대방 헐뜯기에다 ▶향응대가로 표 몰아주기▶같은 지역 사람 뽑아주기▶선거 무관심▶쓰레기장으로 변하는 유세장 등 어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들이 고사리손에 의해 조목조목 적혀 있다.

병역.납세.전과 공개 후 벌어진 후보들의 진흙탕 싸움을 보며 "반장선거보다 못하다" 고 평가하고 있다.

서울 C초등 6학년 梁모(12)군은 "어떤 후보가 내 아들은 군대에 다녀왔다며 청중에게 인사를 시켰다. 참 웃기는 일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 후보는 또 선글라스를 쓴 모델처럼 생긴 누나들까지 몰고 다닌다" 며 어른들의 행동을 꼬집는다.

金모(12)양은 "아빠는 선거뉴스만 나오면 TV를 끄라고 소리치시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회의원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표다. 저질 국회의원들을 우리 국민이 다시 안 뽑도록 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張모(12)양은 "어떤 사람들은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고 투표날 놀러간다고 자랑한다" 며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고 일기장에 기록하고 있다.

총선일기 쓰기를 지도한 서울 창동초등 신충행(辛忠幸.56)교사는 "어른들의 행태를 답습해 아이들 사이에서도 지역감정이 퍼지는 걸 보면서 선거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고 지적한다. 인추협은 선거가 끝난 뒤 일기장들을 책으로 엮어 '아이들 눈에 비친 선거' 라는 제목의 백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박현선.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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