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남북 정상회담에 바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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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진정 한반도에도 새로운 기운이 오는가 보다. 그동안 말로만 무성했던 남북정상회담이 마침내 실현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남북간의 어떤 대화나 접촉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인 무게를 갖는다. 이는 지난 세기 못다한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도 탈냉전적 세계질서의 흐름에 동참하는 일원이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가장 중요한 배경은 정부가 지난 2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남북간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완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최근 다양한 접촉을 통해 현 정부에 대한 신뢰를 표시하면서 현 정부 집권 시기 동안 남북간의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동의를 표시해 왔다.

그것은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이 북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으며 이제 그 결실을 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지난 1994년에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로 합의된 바 있고, 구체적인 추진일정을 협의하는 가운데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무산된 아쉬운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상회담과 이번의 정상회담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선 당시에는 핵문제라는 국제적인 핫이슈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로 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순수하게 민족 내부의 필요성에서 회담이 성사됐다.

따라서 당시에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회담 성사를 중재했지만, 이번에는 남북간의 자발적인 합의에 의해 성사됐다. 이는 그만큼 정상회담 개최의 분위기가 성숙했음을 의미하며 정부의 대북정책이 적절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회담 개최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어서는 안된다. 회담 내용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만났다' 는 사실에만 그친다면 남북관계의 미래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정상회담이 개최돼도 변하는 것이 없다면 국제사회에서도 우리 민족은 '구제할 수 없는 민족' 이라는 시각이 팽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은 반드시 생산적인 만남으로 귀결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 회담의 형식과 절차에 관해 서로의 자존심을 내세워서 역사적인 회담을 격하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회담에서 논의해야 할 의제다. 정부에서도 밝혔듯이 이번 회담에서는 정치군사적인 측면보다는 경제협력과 인도주의적 교류에 많은 비중이 두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적절한 방향으로 생각된다. 지난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의 인프라 구축과 농업부문 개혁사업에 우리 정부가 대규모 협력을 추진하는 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도 기대감을 갖고 있다. 또한 91년에 남북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 의 이행대책을 심도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 합의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기본 장정이므로 이의 실행만 보장된다면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두차례의 베이징(北京) 차관급회담에서 보였듯이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산 1세대의 고령화를 고려해 하루빨리 대규모 상봉이 이뤄져야 한다는 데 대해 대통령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로 인해 더 커다란 남북관계 개선에 지장이 초래돼서는 안된다. 정상회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보다는 대강의 방향에 합의하는 쪽으로 추진하고, 오히려 실질적으로 협력이 가능한 분야에 합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회담이 성과를 거두면 그동안 한.미.일 공조체제를 통해 추진해오던 대북 포괄적 접근구상이 가속될 것이다. 그 결과 북.미, 북.일 수교도 가시화 할 것이며, 이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의 성사가 반가운 까닭은 북한이 그동안 '통미봉남(通美對南)' 정책에 주력했던 태도를 바꿨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은 금물이다. 분단 반세기 동안 쌓인 적대감의 폭은 매우 넓고 깊다. 이번 회담이 남북간의 신뢰를 구축하고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제도화하는 계기가 되도록 냉정한 태도를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윤대규 <경남대 교수.극동문제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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