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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형법은 처벌 … 모자보건법선 예외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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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형법(269조)은 낙태하는 여성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낙태시술을 하는 의사 등도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270조).

하지만 모자보건법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법 14조는 강간·근친상간 및 ‘임신의 지속이 산모의 건강을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대해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특히 ‘산모의 건강을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란 해석하기 나름이므로 비판론자들은 이 규정이 낙태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모자보건법 28조는 ‘이 법에 따라 낙태수술을 받은 자와 한 자는 형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않는다’고 돼 있어 아예 처벌 법규를 무력화하고 있다. 14조 상의 예외규정을 벗어나 낙태를 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에 대한 규정도 없다. 낙태를 사실상 허용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낙태를 단속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놓고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자보건법은 유신 때인 1973년 국회가 아닌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이 법의 효력 자체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대 배종대(법학) 교수는 “당시에는 인구 억제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정부가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처벌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이 모자보건법과 충돌하면서 수사기관의 단속 실적도 미미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05년부터 올 8월까지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는 30여 건에 불과하다. 법원이 벌금형이나 집행유예 등으로 실질적인 처벌을 한 경우(1심 기준)는 8건밖에 없었다. “태아는 잉태된 순간부터 인격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대법원 판례(1985년)의 취지와 상반된 것이다. 대법원은 특히 2005년에는 낙태를 시도하다 태아가 출생하자 염화칼륨을 주입해 사망하게 한 의사에 대해 낙태죄와 살인죄를 모두 인정했다. 대검 관계자는 “사회 통념상 낙태죄가 사문화돼 있어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검찰과 주무 부서인 보건당국 모두 적극적인 단속의 필요성을 못 느껴왔다”며 “처벌 일변도의 정책보다는 의사들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미혼모 지원을 늘리는 등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처벌하지 않는 법’이라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모자보건법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전주대 권창국(법학) 교수는 “낙태죄가 보호하려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인데 실생활에선 산모의 의사(意思)로 무게중심이 넘어가면서 낙태 확산의 원인이 됐다”며 “산모와 가족 구성원의 입장, 태아 보호의 측면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모자보건법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 배종대 교수도 “세계적으로 낙태 규제의 시기나 방법 등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나라처럼 겉으로는 금지하고, 속으로는 방치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낙태는 임신 기간에 따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스위스가 임신 10주 이하로 가장 엄격하고, 독일 12주, 포르투갈 16주, 영국 24주 등이다. 우리나라 모자보건법 시행령은 24주로 돼 있어 매우 관대한 편이다.

박성우·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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