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오에 겐자부로 '나라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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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빗방울에/풍경이 비치고 있다. /물방울 속에/다른 세계가 있다. "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문학적 자서전' 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문학사상사 펴냄)을 펼치면 곧 만나는 구절이다.

오에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쓴 시의 한 대목이라며 인용해 놓은 것이다. 이 구절은 범상하게 보아넘길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에의 산문세계를 압축해 담고 있는 듯하다. 오에는 항상 작은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작은 것 속에 엄청나게 큰 우주가 응축돼 있음이 드러난다. 작은 빗방울에 '다른 세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엔 입만 열었다 하면 우주와 인류, 민족과 계급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주워 섬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이에 비하면 자신이 태어나 자란 시코쿠 숲 주변의 자잘한 삶과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들은 옛날 이야기, 그리고 장애아인 아들 때문에 겪는 심적 고통을 골똘히 천착하는 오에는 지나치게 쇄말적인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지식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에는 이런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실에서 출발해 인생과 문학에 대한 보편적 진리에 도달하곤 한다.

그는 자신의 실존과 유리된 말을 되도록 자제하면서 미시적인 사물과 체험에서 거시적 주제를 이끌어내는 능력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날치기 애국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먼저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영혼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걱정하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는 대목은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내준다.

이와 더불어 인상적인 것은 오에의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 달리 이야기해 공부하는 자세다.

이 책 여러 곳에서 표명된 소설쓰기에 대한 반성적 자의식은 세계문학의 주변부인 일본에서 태어나 활동한 그가 세계의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추측하게 해준다.

단테에서 라블레와 블레이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거쳐 예이츠와 엘리엇과 사르트르에 이르는 그의 광범위한 독서 편력은 단순히 문학 수업기에 한 번 읽고 지나가는 책읽기가 아니라 이들을 극복하려고 평생 힘들게 펼치고 있는 대결이다.

그는 나이 어린 소년을 좋아한 토마스 만을 예로 들며 "소설가란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다.

그리고 일단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뻔뻔스러워져 끝까지 이야기를 하고야 마는 인간인 것이다" 라고 재미있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오에 자신의 소설세계는 '이색적인 고백벽이 있는 인간' 을 즐겨 다루는 일본 사소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계속된 모색이요,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을 서구 낭만주의자들의 계보에 편입하면서 현실 정치나 사회 사상에 대한 관심과 인간을 초월한 신비적인 것에 대한 깊은 눈길이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갈파한 것은 자신의 은밀한 문학적 야심을 드러낸 흔치 않은 대목이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노회하게 자신의 삶과 문학에 가해질 수 있는 다양한 공격을 미리 예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짐짓 겸손해 보이지만 소설가로서 암울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는 그의 자세가 새삼 탄성을 자아낸다.

남진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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