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일본판 ‘반미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일본이 미국에 대해 왜 그러는 거죠?”라는 한 동석자의 질문에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날 이후 일본 정치권의 여러 지인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마찬가지였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 때문” 등 판에 박힌 이야기였다. 그러다 현 집권층 소식에 밝은 일본의 한 신문사 회장으로부터 색다른 분석을 들었다. ‘하토야마-오자와’ 쌍두마차의 까칠한 대미정책은 두 사람의 오랜 교감 끝에 나온 것이며, 그 근저에는 ‘반미(反美)의 추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오자와의 ‘반미의 추억’은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7월 그가 ‘오야지(아버지)’라고 부르며 숭배하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미국의 록히드사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미국 상원에서 공표됐다. 4개월 후 구속된 다나카는 재판 도중 사망했다. 오자와는 7년간에 걸친 1심 재판 과정에서 191차례의 공판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방청했다. 이때 그에게 각인된 건 미국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는 “록히드 사건은 72년 일·중 수교 이후 미국과 상의 없이 중국에 너무 밀착하는 다나카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 측이 만든 함정”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한다. 오자와가 주일 미 대사에게 공개 석상에서 면박을 주거나(2007년), “극동아시아에서 미군은 7함대만 있으면 충분하다”(올 2월)는 발언을 한 것도 미국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청년 시절 6년을 미국에서 보낸 하토야마 총리도 대외적으론 친미주의자처럼 보이나, 엄밀히 보면 ‘극미(克美)주의자’다. 그는 최근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즐겨 한다고 한다. “유학 마지막 해이자 미국 건국 200주년이던 76년 모든 미국인이 ‘미국의 가치’에 열광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 순간 난 ‘일본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정치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유학 시절 지켜 본 베트남 전쟁도 그에게는 ‘미국=선(善)’의 공식을 깨는 사건이었다고 한다.

‘면종복배(面從腹背)’. 요즘 일본의 대미 정책은 미국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는 듯하다. ‘반미의 추억’은 이제 이들에게 하나의 이념으로 굳어져 있다. “변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오자와의 좌우명이다. 과거나 자신의 고정관념에 매달려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쉽게 변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가 보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