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후회스럽고 죄송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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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호 02면

영어의 apology는 재미있는 단어다. 첫째 뜻은 사과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감정이 들어있다. 사죄라고 할 수 있다. Apology의 둘째 뜻에는 변명이나 해명의 느낌이 묻어 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지난주 출간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못 다 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엔 apology의 첫째 뜻과 둘째 뜻이 기묘하게 섞여 있다. 주변 관리를 제대로 못 해 사법 절차의 결정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그는 ‘부끄러운 시민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썼다. 대통령이 되려고 한 것이 가장 큰 오류라고 한 대목에선 ‘동거정부를 생각한 죄, 연정, 지역 구도를 극복하려 한 것. 그것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개혁을 하려 한 것이 무리였을 것이다’라고 썼다. 앞에 것이 사죄라면 뒤에 것은 변명이랄 수 있다.

노무현 회고록에 나온 메모들 가운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직업-거짓말 안 하고 살 수 없는 사람”이란 부분이 있다. 이상과 현실, 어느 한쪽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정치인의 속성을 통찰한 명제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27일 밤에 있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 대화가 오버랩된다. 이 대통령은 “유세를 할 때 처음엔 어정쩡하게 말했다가 선거일이 가까워지니 자꾸 말이 바뀌더라.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고 사죄했다.

그는 또 “내가 이 (세종시)안을 바꾸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도민들에게 도움이 되더라도 혼란이 오고 사회 갈등이 일어난 것에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7년 대통령 후보로서 표를 얻기 위해 자꾸 말을 바꿔야 했던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2009년 대통령으로서 국익을 위해 또다시 말을 바꿔야만 하는 고뇌도 잘 전달됐다.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죄송하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경륜 있는 70세 남자가 입 밖에 내놓기 어려운 표현이다. 더구나 국가원수 지위의 대통령이 생방송을 통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발언이니 자연인 이명박으로서 여간 용기를 낸 게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집권을 위해, 표를 얻기 위해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은 유권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정치에서 약속은 깨어지고 신뢰는 배반당할 수밖에 없는가. 대통령의 사과가 앞으로 다른 정치인들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사용되는 건 아닐까. 대통령의 사과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새삼스러울 뿐이다.

말은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것이다. 화자(話者) 입에서 나온 말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청자(聽者)다. 화자의 의도와 별개로 청자들이 자기의 가치관으로 해석하는 데 말의 특징이 있다. 이제 세종시 문제는 새 국면을 맞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를 민심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게 관건이 될 것이다. 이 대통령으로선 할 만큼 다 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를 가다듬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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