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아름다워] 연극의 참맛은 '이야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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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공연 보는 게 팔자인 사람에게 좋은 작품만한 위안은 없다. 나는 나라 밖에서도 가끔 이런 경험을 하는데, 여행길 여독을 푸는 청량제로 제격이다.

10여일 전 일본에서 '좋은 연극' 한편을 보고 신이 나서 동료들과 거나한 술자리를 했다. 도쿄 시부야의 분카무라(文化村) 시어터 코쿤에서의 일이다. 빡빡한 출장 일정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이게 연극의 참맛이야"라는 탄성을 절로 나게 한 작품은 '적귀(赤鬼.레드디먼)'였다.

작품으로 빠져들기 전 외적 조건이 관심을 끌었다. 일본 연극계 걸출한 스타의 종횡무진 활약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주인공은 희곡을 직접 써 연출하고, 타이틀롤까지 맡는 노다 히데키(野田秀樹.49)였다. 선배인 스즈키 다다시, 니나가와 유키오 등과 함께 세계 정상에 올라있는 일본 연극 연출의 기수다. 도쿄대 재학시절 '꿈의 유면사(遊眠社)'란 연극단체를 만들어 파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노다 맵'을 이끌고 있다.

아무리 그가 팔방미인이라도 작품이 그르면 실망했을 터이다. 그러나 '적귀'는 그저 좋다는 수식어로는 모자란 그윽한 감동을 주었다. '적귀'는 해안가 어느 마을에 표류한 한 남자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적귀'로 매도당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엮었다. 타인에 대한 불관용의 비극,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이 주제인데 이라크 전쟁 등 국내외 정세를 비춰보는 거울로 삼아도 될 만큼 보편적이며 철학적인 깊이가 탁월했다.

바로 '적귀'의 요지부동한 힘은 이런 이야기였다. 실험과 해체 등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가치들이 판을 치는 한국 연극에서 '이야기'는 가장자리로 밀린 지 오래다. 형식이 내용을 앞서니 특이하게 보여주는 데에 급급하다.

형식은 결코 깊은 감동을 동반할 수 없다. '적귀'는 새삼 이야기,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재능 있는 인물의 세계관과 통찰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극장을 나서는데 이 작품이 내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노다 연출의 '한국배우 버전'으로 공연될 예정이라고 노다 측이 귀띔해주었다.

정재왈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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