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후손 없는 기부자 묘소 찾아 33년째 제사로 은혜 갚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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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 제석에는 과일과 과자가 올망졸망 놓였다. 검은 코트를 여민 청년이 두 번 절하고 잔에 소주를 따랐다.

“할머니 덕에 편안히 공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할머니처럼 베풀며 살겠습니다.”

20일 경기 광주군 매산리 공원묘지. 고(故) 이원경(사진) 여사의 무덤에 서울대 직원과 학생이 찾아왔다. 서울대 복지과 직원 세 명과 아동복지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최민상(28)씨였다. 이들은 무덤가 풀을 뽑고 제사 음식을 차렸다. 최씨가 술을 올리자 복지과 임장주 사무관이 추모사를 읽었다. “전 재산을 내놓고 인재를 키워달라시던 여사님의 뜻은 서울대가 영원히 기리겠습니다.”

1976년 세상을 떠난 이 여사는 33년째 서울대 장학생들의 제사주를 받고 있다. 이 여사가 전 재산 300만원을 서울대에 내놓은 것은 73년. 혼자 살던 서울 충현동 2층 양옥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같은 해 집 전세를 뺀 돈 150만원, 장례비로 준비해 놓았던 100만원까지 추가로 기부했다. “유능한 인재를 키워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560만원은 서울대 전체 장학기금(5470만원)의 10%가 넘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이 여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규영 선생의 맏딸이다. 남편 유진희 선생 역시 독립운동으로 일제 시대에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 여사는 48년 남편과 사별한 뒤 바느질과 세탁일 등으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경 여사의 제사를 지내는 중에 추도문을 읽는 복지과 직원들.


서울대는 77년 이후 ‘이원경 장학기금’을 조성해 매년 2~3명의 학생에게 등록금 전액을 지급해 왔다. 그리고 매년 기일을 맞아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과 함께 추모제를 지내온 것이다. 2001년엔 복지과 직원들이 의견을 내 비석을 교체하고 상돌을 설치하는 등 무덤을 새로 단장하기도 했다. 올해 1학기에 이원경 장학금으로 등록금 350여만원을 지원받은 최씨는 “장학금을 받으며 이 여사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구영 학생부처장은 “앞으로도 후손이 없는 기부자들에 대한 예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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