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찬탁 색깔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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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나온 1945년 12월 말을 전후해 평양 고려호텔로 조만식(曺晩植)선생을 찾아온 김일성(金日成)은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우리나라에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저는 백두산에 올라가 빨치산운동이나 할랍니다. " 이 때까지는 자신이 탁치에 반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처음 한동안이긴 했지만 사건 치고 역사상 신탁통치 만큼 국민을 한덩어리로 뭉쳐 일어서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소식이 날아들자마자 모두가 들고 일어나 탁치반대를 외쳤다.

그 때는 좌와 우가 따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탁치는 일제 35년의 질곡을 가까스로 벗어난 이 민족에게 또 한차례 식민통치의 굴레를 씌우려는 열강의 음모로 비쳤기 때문이다.

좌익측이 돌연 태도를 바꿔 탁치찬성으로 돌아선 것은 이듬해인 46년 1월 3일, 소련의 지령 때문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들은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대(對)조선 '한국이 빠른 시일 안에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원조와 협조를 위한 후견제" 라는 걸로 탁치찬성의 명분을 삼았다.

이 때부터 탁치에 대한 찬반을 놓고 좌.우익이 뚜렷하게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립상은 격하고 살벌하기만 했다. 논의가 양극화돼 '빨갱이' 아니면 '우익반동' 이 있을 뿐이었다.

유보적인 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반탁 입장에 섰던 고하(古下)송진우(宋鎭禹)는 운동방법이 과격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가 댓바람에 "그럼 당신은 찬탁인가" 하는 힐난을 들어야 했다. 그는 다음날 새벽 집안에 침입한 괴한들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신탁통치는 끝내 실시되지 못했다. 대신 남과 북에 좌우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면 탁치를 찬성하던 자들이 북한에, 반대하던 쪽은 남한에 정부를 세워 서로 대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당시 찬탁을 했던 사람은 '찬탁〓빨갱이' 란 등식이 낳은 사상적 시각 때문에 걸핏하면 색깔론의 표적이 돼야 했다. 당사자들로선 정말 괴로운 상처였다.

며칠 전 김종필(金鍾泌)자민련 명예총재가 지방의 한 지구당대회에서 "정부 핵심인사 중에 찬탁을 한 사람이 있다" 며 다시 한번 색깔론을 터뜨리고 나섰다.

그게 사실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같으면 비록 찬탁 경력이 있다 해도 한국 땅에 발딛고 탈없이 그후 55년을 살아온 것만으로도 건전한 국민으로서의 검증이 끝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국가를 경영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파문이 번지자 金명예총재는 이번에도 또 어물쩍 발을 빼려 하는 모양이다. 단순히 선거를 위해 사실과는 관계없이 해본 말이라면 너무 무책임하다. 사상을 의심받는 건 친일파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현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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